[김진혁의 돈으로부터의 자유] 8월 4일 돈의 인문학
2020-08-04 김진혁
위대한 사람은 목적을 갖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소망만 갖는다.
- 워싱턴 어빙 -
[파이낸셜리뷰] 금융인문학은 사람에 포커스를 맞추고 서로간에 상처를 주기보다는 행복의 뿌리를 찾는 것이다. 철학의 어원은 필로소피아로 필로스와 소피아의 결합어이다. 필로스는 통찰력을 소피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하지만 필로소피아를 안다고 생활이 바뀌지 않는다. 삶의 태도를 자기 확신하에서 행동으로 이끌어야 한다. 인문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야기를 했다고 처형당한다. 톨스토이도 부인이 임종식 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허름한 역에서 객사한다. 과연 인문학의 존재 이유가 있는가? 언론인 얼 쇼리스는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살인 사건에 연루돼 8년째 복역 중인 비니스 워커라는 여죄수와 마주 앉았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다” 의외의 답에 “정신적 삶이 뭐냐” 재차 묻자,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이요” 그렇다. 빈곤은 밥과 돈의 문제 이전에 생각과 정신의 문제다. 가난한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빵일지 모르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존심의 회복’이다. 강연, 음악회, 연주회, 책과 같은 살아 있는 인문학을 통해 자존심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의 절실함을 깨닫고 1995년 노숙자, 빈민, 마약중독자, 죄수 등에게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열게 했다. 예부터 인문학을 ‘문사철’이라 불렀다. 문장과 역사와 철학을 이르는 말이다. 문장은 기교의 산물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이다. 역사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하고 나아갈 바를 살피는 것, 철학은 관념의 퇴적이나 사념의 유희가 아닌 깊은 생각과 넓은 조망을 통해 진정한 원리를 발견해 가는 살아있는 운동이다. 박제화된 관념의 집합이 아닌 삶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혼의 운동이다.♣ 본원소득
국민순소득(NNI; Net National Income)이라고도 한다. 제도단위(비금융법인, 금융법인, 일반정부, 가계)가 생산과정에 참여하거나 생산을 위해 제공된 자산을 소유함에 따라 발생하는 소득으로, 이는 생산에 의해 창출된 부가가치에서 지급된다. 구체적으로 본원소득은 피용자보수에 영업잉여, 순생산 및 수입세, 순재산소득을 더하여 계산한다.
본원소득 = 피용자보수 + 영업잉여 + 순생산 및 수입세 + 순재산소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