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리뷰] 전두환 사망, 역사적 사죄 없이 떠났다

2022-11-23     전민수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전민수 기자] 전두환씨가 23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9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전씨는 이날 오전 8시 40분경 자택에서 지명으로 숨진 것으로 파악했다. 자택에서 쓰리진 후 오전 8시 55분경 경찰과 소방서에 신고됐고, 오전 9시 12분께 사망사실이 확인됐다. 전씨는 평소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 골수종으로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 10월 26일 12.12 쿠데타 동지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한데 이어 한달도 되지 않아 전씨도 사망을 했다.

12.12 쿠데타·광주 학살 주범

전씨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국군보안사령관으로 10.26 사태 즉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사건에 대해 수사를 하면서이다. 10.26 사태가 발생하면서 계엄사령부 산하에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되면서 박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12.12 쿠데타를 통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내란방조죄로 체포하면서 최고 실세로 부상했다. 이후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권력 장악에 들어갔고, 80년 5월 신군부 쿠데타를 반대하는 광주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면서 수백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그리고 그 해 8월 15일 최규하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8월 29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단독 출마를 해서 당선됐다. 그리고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제 및 간선제를 골자로 한 새 헌법을 만들어 공포를 했고, 1981년 2월 치러진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에 의해 당선되면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피로 얼룩진 5공화국

5공화국이 탄생됐지만 그야말로 피로 얼룩졌다. 신군부 시절 중 언론통폐합을 했고, 이 언론통폐합이 이른바 ‘땡전뉴스’를 만들어냈다. 전두환 정권은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로 4만여명을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54명이 사망했다고 집계했다. 뿐만아니라 국가보안법으로 수많은 민주투사를 억압했다.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7년간 1천535명이었다. 물론 한국경제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에 힘입어 이른바 ‘3저(低) 호황’을 누렸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잇따라 유치하며 국민의 시선을 돌리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민주화 열기 이어져

하지만 민주화 열기는 이어졌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전씨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통해 체육관 선거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자 시민들이 일어났고, 그해 6월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시민들이 합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결국 직선제 개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약속하는 6.29 선언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선언을 해야 했다.

5공 비리·백담사 행

전씨는 퇴임 이후 5공 비리 청문회에 나와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을 하자 이쳘용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외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명패를 던졋다. 이후 여론에 떠밀려 부인 이순자와 강원도 백담사에 내려가 2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김영삼 정부 때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고,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항소심이 확정됐다. 다만 그해 12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별다른 소식을 전하지 않았지만 2017년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을 통해 자신은 당시 발포 명령과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가 하면 5.18 당시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8년부터 재판을 받았다. 966억원에 이르는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은 것과 5·18 당시 강제진압을 직접 사과하지 않았다. 올해 8월 혈액암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 받고 투명 중인데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