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Hi스토리] 전두환 사망으로 재조명된 국제그룹 해체 사건

2021-11-25     이석원 기자
1988년

[파이낸셜리뷰=이석원 기자] 국제그룹이 해체된 지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국제그룹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런 국제그룹의 해체 배경에는 국제그룹의 재정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정부의 개입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와 국제그룹 창업자 양정모 회장의 관계는 실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전씨는 향년 90세로 사망하며, 생전에 전씨와 관련됐던 의혹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가운데 국제그룹의 해체사건은 전씨에 의해 기업이 한순간에 몰락한 안타까운 사건이다,

◇‘왕자표 고무신’에 이어 ‘프로스펙스’까지

국제그룹은 1947년 창업자 양정모 회장이 부산에 설립한 고무신 생산 업체 ‘국제고무’라는 공장에서 출발했다.

이 공장에서 만들던 ‘왕자표 고무신’은 부산 시장을 거의 석권하고 전국에 입소문도 나면서 큰 성공을 거둔다.

이에 국제고무는 국내 제1의 신발류 메이커로 부상하지만, 1960년 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해 60여 명이 희생되고 생산 라인의 80% 이상이 잿더미가 되자 당시 재기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양정모 회장은 희생된 직원들의 장례비, 치료비 등으로 당시 돈 7264만 환을 지급한 후 대대적인 사업 개편에 나서기 위해 사명을 ‘국제화학’으로 바꾸고 운동화 사업을 시작한다.

국제화학의 왕자표 운동화는 출시와 함께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양정모 회장과 국제화학은 재기에 성공한다.

국제화학은 운동화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인 1962년 국내 최초로 미국에 농구화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또한 국제화학은 1973년 사명을 ‘국제상사’로 전환하고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0년대 초반 국민들이 소득이 높아짐에 따라 해외 브랜드에 관심을 갖게 되며 국내 브랜드의 신발의 입지가 점차 좁아져 갔다.

이에 양정모 회장은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 1981년 자체 브랜드인 ‘프로스펙스’를 런칭한다.

국제상사의 프로스펙스는 브랜드 탄생과 동시에 국민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나이키, 아디다스와 함께 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에 1980년대 국제상사는 매출이 2조 원을 달성함과 동시에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까지 오른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기업이 5년 뒤에 급속도로 기울어지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국제그룹 해체의 원인 ‘논란’

1985년 당시 국제그룹의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이 ‘국제그룹 정상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국제상사 건설부문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으로, 연합철강은 동국제강그룹으로, 나머지 계열사는 한일그룹으로 각각 인수되는 등 21개의 계열사가 다른 기업으로 쪼개지게 된다.

1984년 말 경영난으로 1차 부도가 발생한 일은 있었으나 순식간에 재계 7위의 국제그룹이 해체될지는 당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일은행이 밝힌 그룹 해체의 표면적인 이유는 무리한 기업 확장과 해외 공사 부실 등이었다.

실제로 국제그룹은 단기간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재무구조가 부실하게 됐고, 당시 세계 여러 국가들이 앞다투어 환율을 내리는 상황에서 이에 반해 원화는 높은 환율이 유지되고 있어 국제시장에서도 국제그룹의 경영난이 심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국제그룹의 재정 상황이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회생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당시 행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한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양정모 회장이 전두환 정부에 밉보여 그룹이 해체됐다는 것이 재계의 정설이다.

◇전씨와의 악연

전두환 정부는 1983년 발생한 아웅산 폭탄 테러의 유가족들을 위해 ‘일해재단’을 설립하고, 재단의 연간 운영 비용을 반강제적인 협박으로 대기업들의 자발적 기부를 권유했다.

이에 기업 총수들은 정부의 후환이 두려워 큰 금액을 선뜻 내놓았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사업에만 몰두하던 양정모 회장은 5억 원을 어음의 형태로 지급하며 악연이 시작됐다.

결정적인 사건은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발생한다.

당시 부산지역이 선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수였는데, 이 부산지역의 표를 얻기 위해 전두환은 국제그룹의 기반인 부산으로 직접 내려가 양정모에게 선거를 위해 힘을 쓸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 양정모 회장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제사를 위해 부산을 하루 만에 떠나고, 부산지역 선거는 참패한다.

부산지역 선거가 참패한 사실과 선거 도중 양정모 회장이 자리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전씨는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고, 이는 양정모 회장이 전씨의 눈 밖에 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