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Hi스토리] ‘라면 제왕’ 농심, 4분기 이후 실적 전망 ‘맑음’
2022-12-27 이석원 기자
◇농심 창업주 고(故) 신춘호 회장
신춘호 회장은 1958년 롯데그룹에 입사해 1962년부터 일본롯데 이사로 재직하며 맏형인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을 돕고 있었다. 그러다 신춘호 회장이 일본 현지에서 눈여겨보았던 ‘라면’ 사업에 뜻을 나타냈으나 신격호 총괄회장이 이를 반대하면서 형제간에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는 라면을 비롯한 간편식 시장 자체가 협소한 상황이었고, 196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정책과 함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혼식(쌀 이외의 여러 잡곡을 섞어먹는 것)과 분식(밀가루 음식) 장려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신춘호 회장은 라면 사업이 블루 오션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해 1963년 형과의 사업 관계를 정리하고 1965년 현재 농심 사옥이 있는 신대방동에 ‘롯데공업’을 설립하고 라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격호 명예회장이 신춘호 회장에게 ‘롯데’라는 브랜드를 쓰지 못하도록 하자, 신춘호 회장은 1978년에 사명을 ‘농부의 마음’이라는 뜻의 ‘농심’으로 변경했다. 농심은 1965년 회사를 설립한 해에 기술연구소를 세워 독자적인 기술개발을 하며 연구개발(R&D) 노하우를 지금까지 쌓아오고 있다. 이에 농심의 제품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4.5톤 트럭 80여대 분량의 밀가루로 수천 번 실패하다 제조해낸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 국내 최초의 ‘쌀면과 건면 특허 기술’, 국내 최초의 ‘짜장라면’ 등이 수많은 도전 끝에 개발해 낸 결과물이다. 게다가 신춘호 회장은 ‘신라면’, ‘안성탕면’, ‘너구리’, ‘짜파게티’ 등 사실상 한국 라면을 대표하는 굵직한 대표 제품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특히 ‘신라면’은 신춘호 회장의 성을 따 네이밍했고,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 카피 역시 신춘호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농심을 ‘라면 제왕’의 자리에 올려놓은 창업주 신춘호 회장은 올해 향년 92세로 별세했다.◇‘라면 제왕’ 농심
1963년 삼양식품이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삼양라면)을 생산한 후 1960년대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으로 라면시장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며 경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1969년에는 삼양식품과 농심(롯데라면)만이 남아있게 됐다. 농심은 1970년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짜장라면인 ‘짜장면’과 ‘소고기라면’을 잇따라 출시하면서, 기술적 우위를 기반으로 한 성장에 시동을 걸었다. 이어 1971년 믿고 먹을 안전한 간식이 전무했던 시절에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을 출시하며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농심은 1972년 ‘감자깡’, 1973년 ‘고구마깡’, 1976년 ‘인디안밥’, 1978년 ‘바나나킥’, 1979년 ‘꿀꽈배기’를 잇달아 내놓으며 히트 행진을 이어갔고, 라면뿐 아니라 스낵전문 기업으로 발돋움하며 안정적인 사업기반을 갖추게 된다. 1982년 대규모 투자를 통해 안성스프전문공장 준공해 다양하고 완성도 높은 국물(스프)로 라면시장과 농심을 함께 성장시켰다. 농심은 이런 투자를 통한 다양한 신기술과 최신 설비로 1982년 ‘너구리’·‘육개장사발면’, 1983년 ‘안성탕면’, 1984년 ‘짜파게티’, 1986년 ‘신라면’ 등 지금까지 라면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히트 제품을 잇달아 개발해 냈다. 이에 1985년 농심은 라면시장 1위에 올라섰으며, 이듬해인 1986년 ‘신라면’이 출시되자마자 가파른 매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2위와의 간격을 더욱 넓혀 확고한 독주체제를 갖추게 된다. ‘신라면’은 1991년 라면시장 1위에 등극한 이후 지금까지도 정상의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으며, 해외시장에서도 대표적인 ‘K푸드’로 한국의 맛을 알리는 선봉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