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

2023-02-23     어기선 기자
대한제국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2월 23일은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날이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을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본격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일본은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904년 드디어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양국 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만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러·일 양국은 2월 6일 국교를 단절했고, 2월 8일 여순항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2월 9일 일본군은 인천을 통해 상륙해서 서울로 들어왔고, 2월 10일 정식으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밀고 들어온 일본군을 제지할 방안은 우리에게는 없으면서 속수무책이었다.

일본에 협력하라 강요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李址鎔)을 통해 고종을 알현했다. 이 자리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고 일본에 협력해줄 것을 강요했다. 이미 1월 23일 중립선언을 했지만 그 중립선언은 무시된 것이었다. 게다가 2월 12일 주한러시아공사 파블로브는 급하게 서울을 떠났다. 이에 일본공사 하야시는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반일이면서 친러파였던 탁지부 대신 겸 내장원경이었던 이용익을 납치해서 일본으로 압송하는 등 반일 인사를 제거해 나갔다. 한일의정서는 총 6개 조항으로 돼있는데 정치, 군사, 외교 면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지 경영의 합리화를 위한 규정이었다.

고종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할 당시 고종 황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침묵을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설마 승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러시아가 패배할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발틱함대는 천하무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고종황제 역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된다고 해도 결국 러시아가 승리를 하게 되면 종잇조각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발틱함대는 일본에 의해 격침되면서 결국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에서 손을 떼게 됐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는 야욕이 불타오르게 됐다.

친일파 득세, 모든 경제권은 일본으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국내 정계에서는 친러파가 사라지고 친일파가 득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식민지배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각종 경제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한일의정서이다. 물론 같은 해 3월 8일 관보(官報)에 한일의정서 소식이 실리자 온 국민이 비난을 했고, 의정서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동 참사관인 통역 구완희를 매국노로 규탄, 그들의 집에 폭탄이 던졌다. 하지만 이미 조정은 친일파가 득세하게 되면서 일본은 한반도에서 제멋대로 군사적 행동을 했고,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을 하게 됐다. 그리고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부설권을 일본에게 제공하게 됐고, 같은 해 6월 4일‘한일양국인민어로구역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면서 충청·황해·평안 3도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넘겨주는 등 그야말로 우리나라 바다도 넘겨주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식민지배로 가는 첫 번째 단계였고, 이때부터 일본의 수탈은 본격화 됐다. 경제적으로 핍박 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