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물가조절기구 ‘상평창’
2023-02-24 어기선 기자
현재는 ‘화폐’로 물가 관리, 과거에는
현대에 들어와서 물가 관리는 주로 ‘화폐’를 통해 이뤄진다. 시중에 ‘돈’을 얼마나 푸느냐에 따라 물가를 상승시키고 하락시킨다.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있으면 물가는 상승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이는데 주요 수단은 ‘금리’와 ‘국채’이다. 국채를 발행하게 되면 시중에 풀렸던 돈들이 한국은행으로 들어오게 되면 돈줄이 마르기 때문에 물가가 안정된다. 거꾸로 물가가 침체된다면 시중에 풀린 국채를 사들여서 물가를 상승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금리의 경우에는 물가 상승이 심각한 수준이면 금리를 올려서 시중에 풀린 돈을 은행으로 들어오게 해서 물가 상승을 억제하게 한다. 거꾸로 금리를 낮추면 시중에 돈이 풀리게 되면서 물가가 상승한다. 현대는 이처럼 ‘화폐’를 통해 물가 관리를 하지만 과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는 ‘쌀’이 화폐 기능을 대신했기 때문에 ‘쌀’ 관리를 통해 물가 관리를 했다. 그리고 그 기구가 바로 상평창이다.상평창의 기능
상평창은 흉년에 쌀 가격이 올라가면 쌀을 시중에 싸게 내다 팔아 쌀 가격을 떨어뜨리고, 풍년에 쌀 가격이 하락하면 시중에 쌀을 비싼 값에 사들여 시중에 쌀 가격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상평창이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고려시대인 993년으로 이때 금 1천냥을 기금으로 시작했고, 개경과 서경 및 12목에 설치됐다. 그런데 중간에 폐지됐다가 1208년(충선왕 즉위) 3월에 상평창을 모방해 전농사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는 1409년(태종 9) 전라도 관찰사 윤향이 면포 500필로 상평보를 설치했으며, 가을에 곡가가 내리면 포 1필을 2두씩 감해 곡식을 사들이고, 봄에 곡가가 오르면 포 1필에 2두를 더해 곡식을 판매했다. 그러다가 1445년(세종 27)에는 곡가가 폭등하면서 도시주민들의 생활에 큰 위협을 주자 상평법을 실시하고 의창곡 1천석을 기본 삼아 충청도·전라도·경상도 3도에서 시험 삼아 포와 곡물의 교환을 시작하게 했다. 이어 1451년(문종 1) 새로 사창법을 정하면서, ‘경국대전’에 서울과 지방에 상평창을 설치하고 곡식이 귀하면 값을 올려 포를 사들이고, 곡식이 천하면 값을 감해 포를 판매한다고 규정했다. 상평창은 본래 목적인 물가조절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기능과 역할이 왜곡·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되면서 상평창 제도를 별도로 두지 않았고, 진휼청에서 흉년에 진휼미를 내다 파는 사례가 빈번했다. 하지만 19세기 세도정치 시절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감사와 수령들이 중간이윤을 착복하기 위해 곡가가 낮은 고을에서 곡식을 사서 곡가가 비산 고을에 판매하는 것이 널리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