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다국적 은행 역할한 성전 기사단
2023-02-24 어기선 기자
프랑스 귀족 위그 드 파행 주도로
1119년 프랑스 귀족 위그 드 파행의 주도로 뜻이 함께하는 8명과 함께 9인의 기사단을 조직한 것이 시초가 됐다.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는 자신의 궁전인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의 언덕에 거처를 마련해줬는데 해당 터가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자리이기 때문에 성전 기사단이라고 불리게 됐다. 9명으로 시작한 기사단이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가난하게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라는 사람이 수도회와 교황을 설득해서 성전 기사단을 공식 수도회로 인준시키게 해줬다. 교회법에 따라 적법하게 기부, 모병, 영지 관리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게다가 1139년 인노첸시오 2세의 칙령에 따라 기사 수도회들에게 세속적인 의무를 대폭 면제해주는 특혜가 내려지면서 그들이 성지로 향하는 동안 국경과 관세, 세속법의 구애를 받지 않게 됐다.금융기관으로 막대한 부 축적
그러자 기사단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한때 1만명까지 육박했다. 이들은 각지의 요새를 바탕으로 활동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나 영주들이 요청할 때 규합되어 전투를 벌였다. 그렇게 성장을 하면서 2차 십자군 원정이 끝날 때쯤 프랑스 내 광활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할 때 돈을 지참하고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됐다. 순례자들은 돈을 성전 기사단에 맡기면 예루살렘이나 성전 기사단이 있는 요새에서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현대로 치면 다국적 은행 같은 시스템이었다. 1차 십자군전쟁 이후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을 마차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자면 도중에 도적 등을 만나 재산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하지만 2차 십자군전쟁 이후 순례자들은 성전 기사단에 돈을 맡기고 증서를 받으면 예루살렘에서 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간편하게 순례길에 오를 수 있었다.막대한 부 탐냈던 프랑스 국왕
이처럼 성전 기사단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십자군전쟁이 점차 이슬람군 우세로 기울어지면서 점차 기울어졌다. 그런데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십자군전쟁으로 막대한 돈이 지출되면서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탐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필리프 4세는 십자군전쟁을 하기 위해 성전기사단에 막대한 돈을 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전기사단을 박살내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이에 아비뇽에 유수 중이던 꼭두각시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이용해서 성전 기사단이 남색, 악마 숭배 같은 반기독교 행위를 한다고 죄를 물었다. 그리고 프랑스 지부 단원들을 기습적으로 모조리 잡아들인 후 이단이라고 누명을 씌웠는데 이것이 하루에 모두 이뤄졌다. 그것이 바로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이었다. 이후 13일 금요일이 유래됐다.(일설에 의하면 예수가 처형된 날이 금요일이고, 12명의 제자와 예수까지 합쳐서 13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기사단원들은 고문 끝에 바포메트라는 악마를 숭배한다는 자백을 받았고, 화형을 당하는 등 처형이 이어졌다.13일 금요일 유래
그리고 성전기사단은 악마숭배자 단체로 몰려 강제로 해산됐다. 이후 기사단 재산은 왕실로 몰수가 됐다. 훗날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악마가 씌웠다’고 주장하고,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악마가 씌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화형을 처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힘이 센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타켓으로 삼았다. 마을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여성을 악마가 씌운 사람으로 누명을 씌워서 죽인 후 그 재산을 빼앗는 것이 바로 ‘마녀사냥’이 된 것이다. 성전기사단이 해체한 후 이름을 바꾸거나 잠적을 했다. 일설에 의하면 스코틀랜드로 간 일부 기사들이 영국 왕의 전투를 돕다가 프리메이슨의 기원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성전기사단에 대한 무수한 날조 혹은 음모론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