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노비 임복의 면천

2023-03-11     어기선 기자
사진=드라마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노비가 역사의 기록이 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노비 임복은 역사의 기록에 남은 인물이다. 흔히 역사의 기록에 남았다고 생각하면 반역을 했다가 토벌돼서 사망을 한 경우를 떠오르기 쉽지만 노비 임복은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겼다. 노비 임복은 조선 전기 성종 때 인물이다. 그가 왜 노비가 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충청도 진천 외거노비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살지 않으면서 주인의 재산을 불려주는 노비를 의미한다.

외거노비

주인과 함께 사는 노비는 솔거노비라고 부르고 주인 집에 같이 살지 않은 노비는 외거노비라고 부른다. 지주들이 소유한 땅이 타 지역에 있기에 주인의 신뢰를 얻어 주인의 땅을 소작하고 대신 쌀과 곡식을 바치는 사람을 의미한다. 외거노비는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즉, 재산을 어떤 식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외거노비의 삶은 일반 평민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도 했다. 신분은 천민이지만 재산상의 규모로는 몰락한 양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외거노비이다.

그해 가뭄이 들자

1485년(성종 16) 가뭄이 들자 7월 24일 노비 임복은 2천석의 쌀을 나라에 바쳤다. 한명회, 이극배, 윤호 등이 임금인 성종에게 “임복이 곡식 2천석을 바쳤으니, 1백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족합니다. 자원에 따라 그 아들을 양민으로 만들어 주고, 그 인원에 상당한 노비를 그 주인에게 보충하여 주소서”라고 상주했다. 하지만 심회, 홍응 등은 “만약 곡식을 바쳐 종량하는 길을 열어 준다면 주인을 배반하는 자가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니, 진실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반대했다. 7월 28일 성종은 승정원에 명해서 임복을 불렀고, 원하는 바를 물었는데 임복은 네 아들을 면천해 양민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성종은 임복의 네 아들을 모두 종량 시키고 공천으로 그 원주인들에게 보상케 했다. 하지만 네 아들이 아닌 임복만 면천하게 됐다. 7월 28일 사헌부 대사헌 이경동이 임복의 면천이 잘못됐다고 상소를 했지만 성종은 듣지 않았다. 8월 17일 임복은 다시 쌀 1천석을 더 바치면서 네 아들 모두 종량되어 평민이 됐고, 속량된 임복 일가는 진천을 떠나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

면천 사례 늘어나고

임복의 그 이후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임복의 면천 사실이 알려지면서 1485년(성종 16) 8월 20일 전라도 남평(南平)에 사는 사노(私奴) 가동(家同)이 2천 석을 납속(納粟)하고 양민이 되기를 청하여 호조가 이를 보고하였으나, 성종은 비슷한 사례가 계속 나타날까봐 그의 곡식을 받지 않고 종량을 거절했다 물론 임복 이전에는 세종 때 윤덕생이 주인이 특별히 풀어줘 면천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자력으로 재산을 바쳐서 평민이 된 사례는 임복이 처음이다. 이후 중종반정, 을사사화 등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된 일부 노비, 천민들이 면천된 사례가 있지만 노비의 면천이 증가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