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윤석열+안철수, DJP 연합
2023-03-14 어기선 기자
15대 총선 직후 DJP 연합 수면 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 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은 1996년 15대 총선 직후부터 공조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원내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무소속과 통합민주당 당선자들을 영입을 하려고 하자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원구성 협상에 불참했고, 5월 26일 보라매공원에서 국민회의, 자민련 등 야3당이 신한국당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때부터 DJP 연대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1996년 재보궐선거에서 양당은 연합공천을 했고, DJP가 뭉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그리고 1997년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압승을 하면서 DJP연합은 더욱 구체화되는 분위기였다.박태준 영입이 묘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DJP 연합이 큰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을 영입하는데 노력을 했다. 결국 박 전 회장을 영입하면서 사실상 DJP 연합이 성사됐다. 1997년 11월 3일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는 김종필 당시 의원의 청구동 자택을 직접 찾아갔고, DJP연합이 성사됐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박태준 당시 의원은 자민련에 입당해 총재로 추대되면서 연합 성사는 완료됐다. 김종필 전 총재는 성사 다음날부터 자신을 ‘2인자’로 자처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매우 공손했다고 알려졌다. 당시 합의 사항은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전 총재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고, 개헌시기는 1999년 12월 말 이전이라고 못을 박았다. 경제부처 임명권은 국무총리가 가지고, 지방선거 수도권 광역단체장 중 한 명은 자민련 소속으로 한다고 밝혔다.정권교체 이뤄내
결국 DJP 연합은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는 충청권 표심을 김종필 전 총재를 통해 얻어내면서 충청권에서만 43만표의 격차를 보였다. 아울러 김대중 당시 후보를 빨갱이로 몰았던 TK에서도 14%의 득표를 얻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초대 총리는 김종필 전 총재가 맡게 됐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 경제 관료들을 김종필 당시 총리가 지명했고, IMF 사태를 극복하는 계기가 됐다. 집권 직후 치러진 1998년 제2회 지방선거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광역단체장 16곳 중 10곳을 석권하는 승리르 거뒀다. 하지만 집권 2년 이내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고 한 다짐은 집권 2년 차인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해 7워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내각제 개헌 유보에 합의를 하면서 자민련 내에 엄청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러면서 자민련 내에서 탈당을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2000년 16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신인 새천년 민주당과 자민련의 후보 연합 공천이 무산되면서 대부분 지역구에서 두 정당은 동시에 후보를 내보내게 됐다. 이에 자민련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게 됐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 의원들을 자민련으로 보내면서 원내교섭단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1999년 말 한나라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한 이한동 총재를 국무총리로 지명하면서 DJP 연정은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이 합쳐도 원내 과반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각제 개헌은 끝내 무산됐다. 여기에 햇볕정책에 대한 시각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고, 2001년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에 자민련이 가담하면서 DJP연합은 무너지게 됐다. 이로서 이한동 총리는 자민련에서 제명당하면서 무소속 총리가 됐다. DJP연합이 무너지면서 자민련 소속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이 자민련을 탈당해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하면서 자민련은 원내 비교섭단체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