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15일 3.15 부정선거
2023-03-15 어기선 기자
조병옥 박사·장면 박사 입후보
민주당은 1950년대 말이 되면서 자유당을 크게 위협했다. 하지만 민주당 내부에서는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이 날로 격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1959년 11월 26일 정부통령후보지명대회를 열고 구파인 조병옥 박사를 대통령 후보로, 신파의 장면 박사를 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조병옥 박사는 선거를 한 달 앞둔 1960년 2월 15일 지병으로 미국에서 요양하던 도중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승만 후보는 대통령 단독 후보가 됐다. 하지만 자유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민주당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 구호는 국민적 구호가 됐다. 더욱이 자유당은 두 차례 걸친 무리한 개헌으로 민주주의와 헌법을 파괴한 당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상황으로는 자유당은 절대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개표 조작 감행
자유당은 이기붕 후보를 부통령으로 당선시기키 위해 내무부 관료들과, 이정재·임화수 등 정치 폭력배를 동원해서 부정선거와 개표 조작을 감행했다. 자유당은 전국의 공무원과 경찰 등 공권력은 물론 정치 깡패, 완장 부대까지 동원해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주민들에게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그 수법은 기상천외했는데 당시 민주당이 입수한 부정선거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투표함 4할 사전투표 또는 투표함 바꿔치기가 있다. 투표함의 4할 즉 40%를 이승만, 이기붕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로 미리 채워놓았다. 이 투표함을 선거 전 비어있는 투표함과 바꿔치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또 다른 방법은 야당 참관인을 쫓아내는 것인데 선거가 한창 진행 중임에도 선거가 끝났다면서 막무가내로 협박, 납치, 폭행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아울러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을 지도한다면서 3인에서 5인씩 한 조로 투표를 하게 했고, 각 조의 조장은 자유당 후보를 찍게 조원들을 유도했다. 노년층은 아직 문맹자가 많기 때문에 투표를 도와드린다면서 자유당 후보를 찍게 유도했다. 뇌물 살포는 비일비재했으며, 정치폭력배를 동원해서 유권자들에게 압박하는 장면을 찾아내는 것은 쉬웠다. 개표 과정에서도 부정이 동원됐는데 ‘올빼미표’라는 것이 있었다. 일부러 불을 끄고 어둠을 틈타 미리 준비한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는 방법이다. ‘피아노표’는 매수된 검표원이 야당 후보를 찍은 표를 보면 책상 아래에 떨어뜨리는 척하면서 책상 아래로 들어가 양 손가락에 지장을 듬뿍 찍은 채로 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사정없이 찍어서 무효표로 만드는 방법이다. ‘샌드위치 개표’는 다른 후보를 찍은 표 뭉치 위아래에 한 장씩 이기붕 후보의 표를 씌운 후 모두 이기붕 후보 표로 집계하는 방식이다. 이에 결국 민주당은 이날 오후 4시 30분 언론 담화를 발표했는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뤄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행위”라고 규정했다.마산의거의 단초가 돼
개표가 시작되면서 이기붕 후보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자 “이승만을 80%, 이기붕을 70~75% 선으로 조정하라”는 지시가 윗선에서 내려왔다. 그에 이기붕 후보의 득표율이 79%로 하향 조정됐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각지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그리고 5.15 마산의거로 이어졌고, 결국 4.19 혁명으로 번졌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밝혔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다음날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고, 5월 3일 국회에서 사퇴서가 정식으로 수리됐다. 4월 28일에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면서 부통령 역시 재선거를 하게 됐다. 이에 1960년 6월 15일 제2공화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제4대 대통령 선거가 국회 간접 선거로 실시되면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됐고, 제2공화국이 탄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