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과거리뷰]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 만사 무사

2023-03-15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만사 무사는 말리 제국 제9대 황제로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재위 기간은 1312년부터 1337년까이다. 만사 무사에서 ‘만사’는 황제 혹은 무사라고 부른다. 무사는 ‘모세’의 아랍어 표기다. 즉 모세 황제가 되는 셈이다. 만사 무사는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라고 할 수 있다.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도 만사 무사에 빗댈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흔히 아랍 최고 부자라고 부르는 만수르 역시 만사 무사와 비교가 안된다고 할 정도라는 것이 역사적 기록이다.

도대체 얼마나 부자이기에

말리 제국 이전 왕은 순디아타 케이타의 누이 콜른칸 가문 출신인 아부바카리 2세였다. 바다 끝에 뭐가 있는지 찾아내겠다면서 두 차례 걸쳐서 함대를 이끌고 대서양 원정에 나섰는데 두 번째 원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섭정을 맡았던 친천 무사가 왕이 됐다. 만사 무사는 막대한 금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을 이뤄냈다. 당시 세계의 모든 금이 말리로부터 나온다고 할 정도로 금이 넘쳐났다. 만사 무사는 말리 제국이 금으로 도배한 제국이라는 점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어했다. 이런 이유로 1324년 이슬람 성지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날 때 어마어마한 금 과시를 했다. 이 순례는 어마하고 거대하고 화려한 행렬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만사 무사와 만사 무사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개인 시종 500명이 순례를 따랐고, 수만흔 시민들과 귀족들도 행렬에 합세했는데 6만명의 시민들과 황금으로 만든 지팡이를 든 500명의 전령이 행렬 앞을 서고, 1만 2천명의 노예가 따랐다. 말이 노예지, 비단 옷을 입고 황금 주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600마리의 낙타가 한 마리당 100kg이 넘는 황금 덩어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만사 무사는 순례길에 접하는 거지들과 시민들에게 황금을 한 웅큼씩 쥐어 쥐게 해줬다. 만사무사는 가는 곳마다 이슬람 성지인 모스크를 건축했는데 대체적으로 매주 금요일 마다 하나씩 모스크를 지었다. 만사 무사는 가는 곳마다 물건값을 후하게 쳐주면서 물건을 구입했다. 그러다보니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집트의 경우 만사 무사가 지나간 후 10년 동안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고, 10년이 지난 후 겨우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가는 곳마다 만사 무사가 자신의 마을을 지나가지 않기를 기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불만을 접한 만사 무사는 귀국길에 일부러 지나온 길을 방문해서 황금을 사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뱅크의 유래도

만사 무사가 지나간 자리에서 황금이 넘쳐나면서 각 나라는 만사 무사가 뿌린 황금을 동전으로 만들었다. 즉 금화가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만사 무사가 지나간 후 15세기부터 지중해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금화가 거래 수단이 화폐가 됐다. 하지만 각 나라에서 만든 환금의 교환 가치가 달랐다. 만사 무사가 뿌린 황금이 금화로 바뀌게 됐지만 통일된 금화가 없으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각 나라의 황금에 대한 가치가 통일되기 시작했다. 이에 A나라의 황금 가치와 B나라의 황금 가치에 대해 어떤 식으로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 환율이 됐다. 그리고 금화의 교환 가치 기준을 세우고 교환을 했던 사람들이 주로 유태인이었는데 환전을 담당한 유태인이 사용한 탁자를 ‘방크’라고 불렀다. 오늘은 은행 즉 BANK의 어원이 됐다.

만사 무사의 귀국길 행동

이처럼 만사 무사는 막대한 부를 자랑하면서 역사상 최고 부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역사상 가장 돈을 많이 쓴 사람으로 기록될 정도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과연 만사 무사가 역사상 최고 부자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만사 무사가 귀국길에 시중의 황금을 사들여 부랴부랴 물가 안정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가가 폭등한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이기 때문에 귀국길에 부랴부랴 황금을 거둬갔냐는 의문이 든다. 순례길에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황금을 뿌리고 다녔지만 귀국길에 생각해보니 귀국을 하고 나면 자신의 부가 고갈이 되기 때문에 황금을 일부러 걷어간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이미 순례길에 자신의 황금을 뿌리고 다녔기에 황금의 가치가 폭락한 상태에서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뿌릴 때보다는 오히려 더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부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전세계 최고 부자 정도는 아니지 않았겠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메카 순례를 하면서 말리 제국은 건축술이 발발하게 됐다는 점이다. 말리 제국은 아프리카 변방의 제국이었지만 만사 무사를 통해 유럽에 말리 제국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됐고, 그것이 엘도라도라는 이상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식민 시대에 말리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유럽 사람들의 행동이 있었다. 만약 만사 무사가 황금 자랑을 하지 않았다면 말리 제국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바뀌었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만사 무사는 실제로 부자였나

서구 유럽 일각에서는 만사 무사는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19세기 유럽 탐험가들이 말리 제국을 탐험했을 때 원주민들의 생활이 문명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젊은 여성들은 젖가슴을 드러내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활보하고 있었다. 황금 제국 말리 제국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에 과연 말리 제국의 만사 무사는 역대 가장 최고의 부자였다는 것이 사실이었는지에 대한 의심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유럽 서구 사회의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돈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수단이 될지언정 목표가 돼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만사 무사의 재산 척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사 무사가 과소비를 하면서 말리 제국이 멸망을 하게 됐다는 점이다. 서구 유렵에게는 아프리카에 황금이 많이 나오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신대륙 발견’으로도 이어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