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대통령실 용산 국방부 이전, 임오군란부터 주한미군까지

2023-03-18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현 청와대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는 의지가 강하면서 후보지 중 하나로 용산 국방부 신청사가 오르내리고 있다. 윤 당선인 측은 외교부가 사용하고 있는 정부서울청사 별관과 용산 국방부 신청사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방부 신청사로의 이전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민 소통이라는 애초 취지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1조원 정도의 직간접적인 천문학적 비용, 안보 문제 등으로 인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

임오군란부터 오욕의 역사

용산은 한 세기가 훨씬 넘게 외국군이 지배한 지역이기도 하다. 19세기 임오군란부터 일제강점기 미군정시기까지 외국 군대가 용산에 주둔해왔었고,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 1882년 임오년 구식군대가 급료 체불 등에 대한 반발로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용산 일대에 주둔을 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군대는 지금의 용산기지 캠프 코이너에 자리를 잡았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하자 일본군은 청나라 주둔지 그대로 눌러 앉으면서 용산의 수난은 계속 이어졌다. 외국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는 이유에 대해 ‘풍수지리’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풍수지리로 서울시내 가장 명당 중 하나가 용산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궁궐을 지을 때 만약 용산이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명당이었다면 용산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초 풍수지리로 가장 명당은 현 청와대 자리였고, 그 자리가 비좁았기 때문에 경복궁 자리에 경복궁을 세운 것이다. 따라서 풍수지리로 용산이 가장 길한 땅이라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외국 군대가 용산을 눈여겨 본 것은 도성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고, 한강을 끼고 있는데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의 군수창고 기능을 했던 군자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한양 도성에 진입하려고 하면 마포 나루를 이용해야 했다. 마포 나루를 거쳐서 남대문을 거쳐 한양에 진입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마포구가 아닌 왜 용산을 택했을까. 마포구에는 소금 창고 및 세금으로 걷어들인 쌀 창고 등이 있었기 때문에 용산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염창동이나 광흥창 등의 명칭은 과거 소금 창고나 쌀 창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때는 도성과 가장 가까운 용산에 군수창고인 군자감을 만들었고, 외국 군대 역시 도성과 가까운 용산을 택한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본격 주둔

청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청나라 주둔지에 주둔했지만 현재 용산기지의 모습은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주둔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대규모 기지 건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용산에 결집됐다. 한반도 식민지배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용산으로 집결했던 또 다른 이유는 서울역에 철도 역사가 세워지면서 대륙 진출을 위해서 용산에 기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용산에 주둔하면서 서울역을 통해 만주로 군대가 이동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용산은 일본군 기지로 적합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미군이 한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미 24군단 예하 7사단은 서울과 인천에 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주요 시설물 보호와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이때 일본군이 사용했던 용산기지를 미군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은 400여명만 남기고 모두 철수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투입됐다. 그러면서 용산에 주둔했다. 일본군이 남긴 용산기지를 재활용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주한미군은 용산에 주둔해왔다. 주한미군이 용산에 주둔하면서 우리의 국방부 역시 용산에 만들어게 됐고, 오늘날 국방부가 용산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