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조운제도, 광흥창·용산·염리동 그리고 염창동

2023-03-21     어기선 기자
사진=서울시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고려시대부터 조운제도(漕運规章制度)가 시행되면서 각 도에서는 국가에 내는 전세나 대동미를 중앙으로 운송하던 해상교통체계가 구축됐다. 조운제도를 시행하게 된 것은 육로를 거치는 것보다 해상으로 운반을 하면 더욱 수월하게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땅에서 나오는 쌀을 한양으로 실어나를 때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더욱 편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곡선이 서해안을 타고 강화를 거쳐 한양으로 운반됐다.

왜 하필 마포

그래서 마포나루는 그야말로 전국의 모든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왜 하필 마포나루였냐 하면 마포나루가 물살이 가장 약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마포지역에서 물살이 약해지면서 배를 대기 가장 좋은 장소였다. 이런 이유로 마포나루에는 많은 물자가 모였다. 전국에서 걷어 들인 세곡을 배에 실어서 해상로를 통해 이동을 하게 되면 강화를 거쳐 마포나루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마포나루에 물자가 내리게 되고, 그것이 한양으로 운반되는 시스템을 갖췄다.

광흥창·군자감 유래

이렇게 모인 물자들은 각자의 장소로 이동을 해야 했다. 첫 번째 광흥창은 백관들의 봉록 지금을 담당하는 창고였다. 조선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에서는 경술년(1790)에 광흥창 주부(主簿)가 되고 계축년(1793) 가을에 호조가 또 나를 조사했는데, 앞뒤의 낭관(郎官) 10인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법에 따라 처벌되었지만 나는 재임한 넉 달 동안 포흠이 노란 콩 13섬에 불과하였고, 그것도 내가 이직한 뒤 담당 아전 무리들이 몰래 가승(加升)을 은닉하고 다시 보충하지 않은 것이어서 의금부가 용서하자는 의론을 올려 상이 윤허해다고 돼있다. 광흥창이 백관들의 월급 지급을 담당하다보니 이른바 뇌물이 많이 오갔고, 그에 따라 처벌 받은 사례도 많았다. 마포나루에서 내린 물자 중 일부는 군인의 월급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군인들의 월급을 지급하기 위한 창고 즉 군자감으로 향했다. 군자감은 오늘날 KT용산IDC에 위치해 있다. 구한말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주한미군이 용산에 주둔한 이유도 군자감 즉 군인들 월급을 주는 창고가 용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염리동·염창동 유래

강서구에는 염창동이 있다. 염창동은 소금창고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염창동이라고 불렀다. 즉 소금 염(鹽), 창고 창(倉)이라고 해서 염창동이 됐다. 마포나루에서 한양 가는 길에 ‘염리동’이 있다. 이 염리동의 유래는 소금 장수들이 있는 거리라는 뜻으로 염리동이라고 붙었다. 마포나루에 소금배가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소금장수들이 소금을 파는 거리를 형성했는데 그곳이 염리동이다. 이처럼 한양은 경제적으로 시스템을 갖춘 도시였다. 그것은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그것이 오늘날의 동(洞) 이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