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한양 거리, 그것은 도시 계획의 집약체
2023-03-22 어기선 기자
광화문을 중심으로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건축하면서 한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경복궁의 출입문은 ‘광화문’이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넓게 뻗은 거리는 이른바 ‘6조 거리’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정부종합청사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이조, 형조, 예조, 호조, 병조, 공조 등 6개의 관청이 들어선 거리가 이른바 ‘6조 거리’다. 관리들은 6조 거리를 통해 각자가 맡은 관청으로 들어갔고, 일을 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퇴청한다’는 말이 나왔다. 즉, 관청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광화문에 6조 거리가 있다면 광화문에서 남산을 바라볼 때 왼쪽으로는 종각이 있다. 종각에서는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거리를 ‘종로’라고 불렀다. 종로에는 국가가 허락한 상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이른바 육의전이다. 이 육의전에서는 정부의 허락 없는 장사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막대한 부를 육의전이 독점할 수 있었다. 육의전에 들어갈 수 없는 상인들은 한양땅 안에서 장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한양땅 밖에서 장사를 하게 됐다. 주로 마포나루에서 숭례문(남대문)까지 이어지는 거리에서 장사를 하게 되면서 오늘날 남대문 시장이 만들어졌다.고위 관료들의 사는 곳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고위 관료들 역시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사는 곳을 이사해야 했다. 고위 관료들은 경복궁이나 6조 관청으로의 출퇴근이 쉬워야 했다. 따라서 광화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대궐 같은 기와집을 마련해야 했다. 현재 북촌이나 청운동 등에 기와집이 많은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북촌이라고 부른 이유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청계천 남쪽을 ‘남촌’이라고 불렀고, 주로 하위 관리나 몰락한 양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들이 거주했다. 중촌은 청계천 주변을 이야기하며 중인들이 거주했다. 왕은 제사를 지내는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토지와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를 합쳐 종묘사직이라고 불렀다. 이런 이유로 광화문에서 남산을 바라볼 때 왼쪽에 종묘를 만들었다. 현재 종묘에는 조선시대 왕들의 위패가 모셔졌다. 그리고 남산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사직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사직동이 나오게 된 유래이다.성균관 그리고 반촌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했기 때문에 성균관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성균관대학교에 성균관을 차렸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입히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반촌이 생겨났다. 반촌은 성균관 유생들을 위한 천민집단 거주지이다. 또한 조선시대는 농사에 필요한 소를 도축하는 것을 금하면서 소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는데 유일하게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소고기를 먹이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면서 전국에 있는 소가 성균관 근처로 모여서 도축이 됐는데 그것이 오늘날 마장동이 됐다. 이처럼 한양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런 계획도시의 모습이 사라지게 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6조 거리에서 6조 관청이 사라지게 되면서 상당히 넓은 거리가 탄생됐다. 그것이 오늘날 현재 광화문 광장이 된 것이다. 그것은 해방 이후 산업화 되면서 과거 한양의 계획도시 모습은 이제 흔적으로나마 찾아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