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칼럼] 우리는 너무 급하게 정답을 찾는 게 아닌가?

2023-03-25     김진혁
[파이낸셜리뷰] 인생의 선택지에 정답은 없다. 세상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진행된다. 할 수 있는 일은 차분하면서도 탄탄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때론 삶이 엉망으로 흐트러질지라도 자괴감과 불안에 짓눌러서는 곤란하다. 이럴 때일수록 삶은 누구한테나 똑같이 힘들고 추하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찾아야 한다. 사건 자체보다 해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고 변화무쌍하다.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생각해보면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세상일이 좋고 나쁨을 예측할 수는 없다. 누군가 실패로 어깨가 축 처져 있다면 “이번 일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지 누가 알아?”라고 격려하면 좋겠다.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순간을 직면하라.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운과 노력이 뒷받침되면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 세상일의 매력은 순조로움보다도 전화위복에 있다. 성난 파도가 유능한 선장을 만드는 것과 같다. 장자 ‘도덕경’에 나오는 역설 이야기다. 장자가 산속에서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는데, 옆에 있던 나무꾼이 베지 않았다. “베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오?”물으니 “이 나무는 너무 크고 쓸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요”라고 했다. 장자는 생각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으므로 살아남았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장자가 산에서 내려와 친구 집에 머물렀다. 친구는 하인에게 거위를 잡아 요리하게 했다. 하인은 주인에게 묻기를 “울 줄 아는 거위와 울 줄 모르는 놈 중 어느 것을 잡을까요?”라고 물었다. 주인이 말하길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나무는 쓸 수가 없어서 살았고,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다. 답은 정해진 것이 아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느 경우가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의 이치도 철저한 준비를 하거나 오랫동안 걱정한다고 해서 과거나 미래의 사건이 바뀌지 않는다. 삶의 중요한 자세는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모든 행위를 인생의 마지막 행위인 것처럼 하라”를 기억하라. ‘지금 여기를 살아라.’이 격언 역시 현재를 온전히 사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삶의 의미란 단순히 바라보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한 번쯤 맞닥뜨려본 인생의 절박함에 정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