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28일 김수환 대주교 추기경 임명

2023-03-28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9년 3월 28일은 교황 바오로 6세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날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카톨릭 역사를 대표하는 동시에 지금까지도 국민들에게 존경 받고 있는 인물이다. 5.16 쿠데타, 87년 민주화운동 등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목소리를 냈으며, 빈민 구제 등에 앞장 선 인물이다.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1922년 7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김수한이었는데 신학교에 입학할 즈음 관청에서 관련 서류를 떼던 중 이름이 ‘김수환’으로 올라간 사실을 알았고, 김수환이라는 이름도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천주교인들은 이름이 아닌 세례명으로 부르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고, 김수환 추기경이 된 것이다.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해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고, 교장이던 장면은 김수환을 불러 일본인 장학사 앞에서 노발대발하면서 따귀를 때렸다. 아직 어린 학생 김수환이 경찰에 해코지라도 당할까 우려돼서 일부러 대노한 척 했다는 것이다. 만약 장면 박사가 이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목숨까지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 장면 박사는 인연이 됐고, 김수환 추기경은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해방 후 본격적인 사제의 길로

해방 후 사제 서품 위해 성당에서 지내던 중 여인의 고백을 받았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중히 거절을 했고, 오늘날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사제 수업을 받는 사람에게 여인이 고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에서 따왔다고 한다. 1966년 6월 15일, 사제 수품 15년차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신설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며 주교로 수품됐다. 1968년 4월, 마산교구 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차에 교황 바오로 6세가 김수환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며 대주교로 승품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이자 당시 나이 47세로 전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이 됐다. 물론 중세 시대 때는 10대에 추기경이 된 경우도 있었다.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군부독재는 다른 사람도 아닌 김수환 추기경이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점을 십분 발휘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 앞장 선 인물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수환 추기경과의 면담을 가졌고, 그 자리에서 ‘정교 분리’를 주장했다. 즉, 정치와 종교는 분리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추기경은 “교회는 단지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 역할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종교계가 노동 문제에 개입한다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불만을 터뜨리자 “사용주는 개개 노동자에 비해 원래부터 엄청난 강자인 데다 중앙정보부, 경찰 심지어 노동청까지 기업주 편이고, 노동자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이같이 김수환 추기경의 의지는 확고하기 때문에 19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심지는 명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은 종교시설이기 때문에 경찰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거액 1천만원 수표를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보내면서 긴급구호를 위해 쓰라고 했다. 또한 전두환을 찾아가 “그만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전두환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하려고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이라는 말은 유명한 일화이다. 민주화 운동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에서도 앞장 섰다. 1997년 1월 노동법, 안기부법 통과로 노동계 총파업이 일어나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1년 후인 1998년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강연회’를 열면서 법정스님을 명동성당에 초청하는 등 종교 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햇볕정책을 강력하게 폐지를 요구하는가 하면 국가보안법 폐지·수도 이전·ㅎ사학법 개정 등에 반대를 하면서 여당 지지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께 카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향년 86세로 선종했다. 선종 당시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