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온돌에서 아파트까지
2023-03-31 어기선 기자
구들이라고 부르는
원래 구들이라고 부른다. 화기(火氣)가 방 밑을 지나 방바닥 전체를 덥게 하는 방식으로 전통적인 방식을 ‘구들’, 현대에 파이프 난방까지 포함해서 온돌이라고 표현한다. 방바닥 밑에 깔린 넓적한 돌(구들장)에 화기를 도입시켜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로 난방을 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현대 들어와서 아파트가 난립하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서양인들이 복층 단독주택을 선호하는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도 온돌이기 때문이다. 온돌은 기원전 4세기 옥저 시대부터 이어져왔다고 알려졌다. 구당서에는 고구려 때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때어 따뜻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같은 기록에는 백제는 고구려와 습속이 유사하다고 돼 있기 때문에 온돌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온돌은 방 일부만 데우는 형식이라면 고려시대 중기에 와서 현재 방 전체를 데우는 온돌 구조가 완성됐다. 13세기 개경을 중심으로 중상류층이 온돌 사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말기에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온돌이 확산됐다.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보급
다만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았고, 온돌은 주로 하층민 문화였다. 이에 궁궐에서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온돌에 대한 기록이 적은 편이었다. 궁궐에도 온돌이 없었다. 하지만 경복궁은 19세기 중건됐기 때문에 온돌이 들어가 있다. 17세기 온돌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기후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경신대기근으로 불리는 소빙하기에 접어든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온돌 문화가 보급됐고, 나무땔감의 수요량이 급증했다. 이에 구한말까지 민둥산이 아닌 산이 없을 정도가 됐다. 더욱이 석탄채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산림자원의 황폐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18세기 산림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이 증가했다. 조선정부는 산림 보호를 위해 금산(禁山) 규제와 비변사와 각 지방 군관을 동원해서 대규모 나무 심기를 시행했다. 하지만 온돌 문화를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나라들이 석탄 채굴로 에너지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했는데 우리나라는 석탄매장지가 주로 험한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운반이 쉽지 않아서 결국 해결을 하지 못했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한국식 온돌 문화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동시대 인물 성대중도 청성잡기를 통해 무리한 벌목으로 인한 산림파괴와 젊은이들이 온돌 때문에 게을러진다고 지적했다.일제강점기 때 황폐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 산림 수탈이 더욱 극심했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전국은 그야말로 민둥산이 됐다. 게다가 1950년대까지도 가정용 연료의 80%는 나무였다. 민둥산이 되면서 산에다 나무를 심자는 동요까지 나왔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도 해결을 보지 못했다. 1970년대 나무 대체재로 연탄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무분별한 산림 벌목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목일이라는 기념일까지 만들면서 계속해서 나무 심기를 해왔고, 2차 대전 이후 황폐해진 숲을 복원한 모범국가 중 하나가 됐다. 연탄이 보급되고, 보일러가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단층 구조의 집이 보편적이었던 이유는 온돌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온돌이 워낙 무겁기 때문에 복층 구조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연탄이 보급되고 보일러가 보급되면서 복층 구조를 올릴 수 있게 됐다. 이것이 1970년대부터 아파트가 보급되는데 원동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