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후추의 역사

2023-04-04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후추는 유럽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향신료이다. 냉장고가 없었던 시대에는 음식을 오래 보존해야 하는 기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는 겨울이 오기 전에 사육하는 동물들을 모두 잡아 먹었다. 혹독한 겨울에 사람이 먹을 것도 없는데 가축에게 사료까지 챙겨줄 수 없기 때문이다. 고기를 오래 보관해야 하는데 주로 소금을 잔뜩 넣어 소시지나 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후추라는 것이 새롭게 등장했다. 고기의 누린내도 없애주면서 방부제 효과도 있어 고기가 쉽게 상하는 것을 막아줬다. 후추가 유럽게 전해진 것은 기원전 4세기 경이다.

아라비아 상인 통해 후추 전달

후추는 인도에서 생산돼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레바논의 베이루트 등에 전달됐다. 그러면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통해 전유럽에 후추가 공급됐다. 후추를 접한 유럽인들은 그야말로 열광했다. 후추를 통해 고기의 누린내를 없앨 수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수요가 폭증하면서 후추 가격이 원산지에 비해 100배 비싸게 형성됐다. 이러다보니 일반인들은 후추를 구경할 수 없었고, 왕실과 귀족들의 전유물이 됐다. 일부 귀족들은 고기를 아예 후추로 둘러싸게 해서 요리를 하는 것을 부의 과시로 여겼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 후추

12세기 십자군 전쟁이 터진 이유는 후추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15세기 후추 가격이 폭발적으로 급등했는데 이는 오스만 투르쿠 제국이 후추 무역의 중심지였던 지중해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후추 무역이 중단되면서 후추는 부르는 것이 가격이 됐고, '검은 황금'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후추 한 줌의 가격이 신발장인의 1년치 임금이고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소작료나 집세 대신 후추 몇 알을 지불하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후추 중계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기 시작했다. 그 막대한 부는 예술이나 과학 등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것이 곧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하지만 서유럽 입장에서 너무 비싼 후추를 사먹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추를 찾아 인도로 가는 길을 열어야 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가 가로 막으면서 육로로는 도저히 길을 열 수가 없었다.

포루투칼, 인도양 길 열다

이에 결국 바닷길을 열어야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포루투칼이 먼저 그 길을 열었다. 마침내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후추를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 포루투칼은 함대를 동원해 인도로부터 후추를 강탈했다. 포루투칼이 후추를 얻었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스페인은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닿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등이 동인도 회사를 만들어 후추 중계에 뛰어들면서 가격은 점차 안정화됐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후추 재배가 성공되고,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후추가 공급되면서 점차 서민들도 후추를 먹기 시작했다.

후추 소비 줄어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귀족들은 후추에 대한 소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후추가 더 이상 귀족의 사치품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후추에 손이 가지 않기 시작했다. 후추의 소비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파산을 하기에 이른다. 반면 영국 동인도 회사는 후추 대신 면화나 설탕 등에 관심을 보였고, 식민지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8세기 되면서 후추 파동이 마무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