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설탕의 역사
2023-04-05 어기선 기자
15세기 설탕의 유럽 전파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설탕을 식품이 아닌 수입 의약품으로 취급했다. 그리스 의사 디오스코리데스는 설탕을 방광과 콩팥을 위해 음료수로 섭취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로마의 대플리니우스는 설탕은 의료용으로만 사용된다고 주장했다. 아라비아 상인들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면서 유럽 국가 곳곳에서 설탕의 존재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중세 후기 유럽은 설탕의 수입이 늘어났는데 값비싼 수입품이었다. 이에 귀족들만 설탕을 구입할 수 있고, 서민들은 설탕보다 값싼 꿀을 사용했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앞다퉈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마침내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스페인 사람들은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하면서 그들에게 사탕수수를 전파했고, 콜럼버스가 두 번째 항해에서 사탕수수 묘목을 신대륙에 가져가게 됐다. 스페인은 카나리아 제도, 마데이라 제도, 카보베르데에서 목재와 원자재를 착취하고 설탕을 생산하는 것으로 가장 큰 수익을 얻어내기 시작했다.설탕의 역사는 흑인의 역사
유럽인들은 감독관직을 제외하고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많은 노동력이 요구됐고, 그 해결책으로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사냥해서 중남미로 데리고 와서 설탕을 만들게 했고, 만들어진 설탕을 유럽으로 팔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사탕수수로부터 얻은 추출액의 양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는 압착기술이 개발되면서 설탕 플랜테이션이 만들어지게 됐다. 설탕 압축 기계는 결국 흑인 노예들이 돌려야 하는데 만약 흑인 노예의 팔이 기계에 끼게 된다면 감독관은 과감하게 흑인 노예의 팔을 칼로 잘라내는 등 비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줬다.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중남미에서 설탕 제조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스페인의 돈줄이었던 설탕 제조가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스페인은 남미로 팔을 뻗었고, 은광을 개발하면서 많은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18세기 설탕은 호황 산업
18세기 들어서 설탕은 호황 산업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후추’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는 유럽은 앉아서도 설탕을 얻어내고, 그것을 유럽 전역에 팔 수 있었다. 18세기 후반 설탕의 5분의 4는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나왔다. 설탕은 유럽인들의 식습관을 크게 바꾸게 됐다. 잼, 사탕, 차, 커피, 코코아 등은 물론 생크림에 설탕을 집어넣으면서 생크림도 본격적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됐다. 18세기 나폴레옹 전쟁 등의 사건으로 인해 유럽에 설탕 가격이 급등했고, 설탕 제조업자는 유럽의 신흥 귀족으로 급부상하게 이르렀다.흑인 노예 해방, 이제는 계약관계 노동자로
18세기부터 불어닥친 흑인 노예 해방은 더 이상 흑인을 노예 관계로 설탕 제조에 투입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다보니 계약 노동자로 설탕 제조에 투입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되면서 대서양과 아프리카를 오갔던 노예선이 점차 사라지게 됐다.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 인도에서 계약 노동자를 공급받기 시작했다. 미국은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었고, 주로 중국이나 일본 출신 노동자들을 이주시켰다.설탕,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의 열량 대체재로
설탕 제조가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18세기부터 설탕 가격이 계속 낮아지게 됐다. 그때 영국으로부터 산업혁명이 발생했고, 자본가들은 기계를 돌릴 노동자들을 구했다. 노동자들 입장에서 과거에는 사먹을 수 없었던 설탕의 가격이 낮아지면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됐다. 같은 돈으로 채소, 고기 혹은 곡물을 사는 것보다 설탕을 사는 것이 더 많은 양을 살 수 있었다. 배고픈 노동자들로서는 설탕을 통해 열량을 보충해야 했다. 하지만 설탕물만 계속 마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설탕물의 부담스러운 단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홍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먹은 홍차는 2년 넘게 운송한 것이기 때문에 품질이 낮았다. 따라서 귀족들이 마시는 홍차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설탕을 사탕으로 만들면 오랫동안 입안에 머금을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 입장에서 사탕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