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보부상

2023-04-06     어기선 기자
KBS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보부상은 봇짐장수인 부상(負商)과 봇짐장수인 보상(褓商)이 합쳐진 말로 흔히 '장돌뱅이'로 불리었다. 보부상은 삼국사기 기록에도 나와있듯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는데 도로가 발달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특징 때문에 보부상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5일장이 발달하면서 하루에 12~16km 정도의 거리를 25kg 가량의 짐을 지고 다녀야 했다. 보부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목화솜을 달은 패랭이 모자이다. 이는 이성계와 연결이 된다. 백달원이라는 행상인이 하루는 길을 가는데 발목에 화살을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는 장군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가지고 있던 목화솜으로 쓰러진 장군을 지혈시키고 치료를 한 적이 있다. 그 장군이 이성계 장군이었다. 이에 이성계 장군과 백달원이라는 보부상이 인연을 맺으면서 조선 건국에 도움을 주게 되면서 조선 정부는 전국 행상을 독점할 수 있는 부상청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전국적으로 보부상의 거점인 임방을 만들어 관리했다. 백달원은 다른 떠돌이 보부상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패랭이 모자에 목화솜을 달기 시작하면서 보수상하면 목화솜 달은 패랭이 모자가 상징적이 됐다.

관허 상인

보부상하면 그냥 떠돌이 장돌뱅이로 생각하기 쉽지만 국가에서 관리하는 관허 상인이었다. 보부상들은 공식적으로 국가에 등록을 하고, 채장이라는 신분증을 받고 활동해야 했다. 이에 국가를 상대로 세금을 내야 하고, 국가는 노역도 시켰다. 임진왜란의 경우 조선 정부는 보급을 위해 보부상을 동원했고, 보부상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보부상은 그만큼 국가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았다. 채장이 없으면 장시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5일장에서 독점적인 장사권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 정부 즉 조정이 눈을 감아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보부상들은 장터에서 장사를 하는 다른 장사꾼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하지만 고을 수령은 눈을 감아야 했다.

어용 단체로

관허상인이다보니 어용단체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 독립협회의 활동을 황실이 제어하기 위해 보부상 조직인 황국협회를 만들었다.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농민군을 상대로 하는 전투에도 참여했다. 황토재에서 관군을 물리친 농민군은 향군은 도망가도록 놔뒀지만 보부상만은 악착같이 따라가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존 보부상들이 어용단체로 전락하면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보부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민간 보부상은 ‘정치’에는 완전히 관여하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인 보부상들이 등장한 것이다. 민간 보부상들이 등장한 이유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일제가 강제로 해산하면서 기존 보부상 조직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일제 전후로

일제시대 때에 철도가 생겼다고 하지만 대도시 중심으로 물류가 움직였기 때문에 지방은 여전히 5일장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민간 보부상들의 존재는 지방에서는 필요했다. 이에 민간 보부상들이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됐다. 한편, 일제강점기 전후 친일파로 돌아선 보부상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대준 보부상들도 있었다.

광복 이후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보부상은 존재했다. 아직까지 자동차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설사 자동차가 있다고 해도 기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보부상들이 국군과 미군에게 물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게부대’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보부상의 존재는 있었다. 아직까지 도로가 읍단위까지 뻗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보부상의 존재는 읍단위 주민들에게는 필요했다. 하지만 점차 교통이 발달하면서 보부상의 존재는 점차 사라지게 됐고, 현재에는 보부상들이 다니는 길이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