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칼럼] 삼성그룹의 도전과 위기(2) : 이병철회장의 사업보국 정신
2023-04-20 정인준
호암의 사업보국의 시작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에 경남 의령군 정곡면의 유복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병철은 1930.4월 입학한 와세다 대학 중퇴 후 귀국, 1936년(26세)에 부모로부터 받은 年收 300석 재산으로 마산에서 정미소, 운수회사를 운영하면서 은행 융자로 김해평야 전답 200만평을 매입 대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 전쟁 확대로 은행 대출중단, 전답시세 폭락에 따라 부채청산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사업 출발 이전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경영의 어려움을 깨닫고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호암 이병철은 재출발을 위한 사업을 찾아 만주, 베이징 및 칭다오 등 중국 상권을 조사한 후 1938년 3월1일(28세)에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와 중국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시작하였다. 1939년 3월에는 여유 자금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의 「조선양조」를 매수, 김재소를 사장에 이창업과 김재명을 공장장으로 임명하고, 책임경영제를 실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전시 체제 중 국내 불황에도 불구하고 양조사업의 호황으로, 이병철은 1년 만에 대구에서 고액납세자가 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 대구 조선양조 경영이 순탄한 반면, 한국경제는 북한의 일방적 송전 중단으로 인한 전기 공급 부족으로 소비재 생산이 안 되어 국민 생활수준이 태평양전쟁 이전의 절반으로 하락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경제상황을 목격한 이병철은 무역이 국가적으로 급선무라 생각해 1948년 11월(38세)에 종로 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였고, 오징어·한치를 수출하고 면사·강재를 수입하는 국제무역업을 시작하여 창사 1년 반 만에 천우사, 대한물산, 화신산업 등 경쟁 기업을 제치고 국내 무역업 랭킹 1위에 올랐다. 1950년 2월 일본 점령군총사령부(GHQ) 초청으로 일본 경제단(15명) 일원으로 참가해 패전 후 재기하는 일본 경제를 시찰한 호암 이병철은 “머지않은 장래에 일본과의 무역이 반드시 활발해 진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정인준 저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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