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해외여행 해제, 하와이 이민사

2023-04-22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이 금지됐었지만 이제 엔데믹으로 접어들면서 해외여행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와이 여행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하와이의 이민사를 보면 그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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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 구제 차원에서

구한말 대한제국은 빈민칭의 해외 이민을 적극 장려했다. 고종이 직접 칙령을 내려 국가가 부양할 수 없는 빈민들을 이민 시켰다. 주로 미국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 등지에 나갔다. 조선과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외교관계가 시작됐다. 그리고 1893년 1월 3일 하와이에 도착한 한국인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정식 이민자는 아니었다. 최초 이민자는 1901년 1월 9일 도착한 피터 류였다고 전해진다. 합법적인 최초 이민자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122명인데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주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제물포 내린교회 출신이다. 하와이 이민은 조선내 미국계 개신교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시 하와이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를 더 이상 쓸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근로자로 부려먹었는데 중국인들보다 조선인들이 더 성실하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 내 개신교 교회에게 이민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교인들에게 하와이 이민을 권했다. 이후 1905년까지 7천291명의 이민자가 하와이에 도착했으며, 1915년까지 총 8천47명의 한국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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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결혼 성행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농장주들의 채찍을 맞아가면서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해야 했다. 낮은 저임금에 인격적으로 무시 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악착같이 버텨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초창기에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점차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와이에 정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사진 결혼이 탄생했다. 초기 이민자가 7천여명이었는데 부녀자는 500여명 정도이고, 결혼할 수 있는 처녀는 10여명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나이든 홀아비들이 많았다. 나이든 홀아비들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과 노름 그리고 아편에 중독됐다. 일의 능률이 떨어지면서 농장주는 새로운 방안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사진결혼이다. 하와이에 이민 온 남성과 한국에 사는 여성이 사진을 교환한 후 부부의 연을 맺는 방식이다. 이에 1910년~1920년까지 사진 신부가 대략 600~1천명 정도 된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에서 하와이로 시집갈 때 신부는 남편의 젊었을 때 사진을 봤던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진보다 상당히 늙었기 때문에 많은 실망도 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의 생활이 상당히 비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 최초 사진 신부는 1896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천연희씨로 알려졌다. 19세인 1915년 하와이 마우이섬 파이아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27살 연상 길찬록씨에게 사진신부로 시집가서 1997년 101세로 사망한 여성이다. 하와이 이민이 1910년대 활발해지면서 일본 정부는 하와이 이민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와이 대신 다른 지역으로 이민을 가게 됐는데 그 나라가 멕시코이고, 멕시코 용설란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멕시코 용설란 농장에서 일하는 조선인을 ‘애니깽’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