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10억병 팔린 두꺼비 소주, 소주의 역사

2023-04-25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하이트진로가 출시한지 3주년 맞이한 두꺼비 소주 ‘진로’가 누적 판매량 10억병을 돌파했다고 25일 밝혔다. 출시 이후 1초에 11병씩 판매가 된 셈이다. 두꺼비 소주 진로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에도 판매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에는 전년 대비 판매량이 약 5% 증가했다. 팩소주와 페트소주 등 다양한 라인업을 갖춘 가정용 제품이 37%가량 판매되며 매출을 이끌었다. 팩소주와 페트소주가 전체 가정용 시장 판매의 17%를 차지하는 등 올 1분기에도 전년동기 대비 약 8% 증가하면서 상승 흐름을 이어갔다. 유흥용 제품은 약 10% 성장한 것으로 집계됐다.

소주란

소주를 평안북도에서는 아랑주, 개성지방에서는 아락주라고 불렀다. 이는 아랍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땀’을 가리키는 아랍어인 ‘아라크(Araq)를 한역(漢譯)한 아자길(阿刺吉)·아리걸(啊里乞)’이라고 중국에서 불렀고, 이것이 한국으로 오면서 아락주 혹은 아랑주로 불리게 됐다. 페르시아의 과학자인 무하마드 자케리아 라지가 알코올의 증류기법을 발견했다. 이후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위스키 등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로 전파되면서 소주가 됐다. 소주는 과거에는 쌀로 만든 ‘증류식 소주’로 불리었다. 하지만 술을 증류기로 증류해 주정을 만들고 이 주정을 물을 희석하여 정제하는 희석식 소주가 오늘날 통상적으로 우리가 부르는 소주가 됐다.
사진=픽사베이

소주는 언제 유래됐나

소주는 고려 충렬왕 때 쿠빌라이 칸이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진출할 때 전해졌다고 한다. 몽골 군대의 주둔지였던 개성과 전진 기지가 있던 안동과 제주도에 소주 제조법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소주의 최초 기록은 고려사에 공민왕 때 경상도 원수 김진이 소주를 좋아해 기생과 부하를 모아 소주도(燒酒徒)가 됐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소주가 양반 이상이 마시는 고급주였지만 1920년대에는 3천200개 이상 소주 양조장이 한반도에 존재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쌀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이에 희석식 소주가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도 쌀 부족 현상이 계속 일어나면서 희석식 소주가 대세를 이뤘다. 또한 희석식 소주가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서민들도 소주의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사카린을 사용했지만 그 이후에는 다른 감미료를 사용했다. 소주의 맛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1도 1사 원칙도 정해져

1970년대에는 소주업체의 과다 경쟁 때문에 1도 1사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1988년 이 원칙을 폐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지역의 소주가 유통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각 지역별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은 진로의 참이슬이 대표적이며, 강원도는 처음처럼이 대표적이다. 충북은 시원한 청풍, 충남은 O2린, 전북은 진로의 하이트(19%), 처음처럼이 대표적이며 광주, 전남은 잎새주가 대표적이고, 대구, 경북은 참소주가, 울산, 경남은 화이트, 좋은데이가, 부산은 C1, 제주은 한라산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