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이앙법(모내기)
2023-04-26 어기선 기자
벼 재배는 신석기부터
우리 국민은 쌀을 주식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에 벼를 키우고 있다. 벼를 키우기 시작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부터이다. 다만 역사적 기록으로는 백제 다루왕 6년으로 돼있다. 모내기 즉 이앙법은 고려말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와 일본에 보급됐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나 정착이 됐다. 즉 그 이전에는 논에 그냥 볍씨를 뿌리는 방식인 직파법을 사용했다. 기록상으로 고려 공민왕 때 모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널리 퍼진 시기는 조선 광해군 이후이다. 모내기 즉 이앙법은 모판을 따로 키우고 논에 물을 댄 후 모내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모작이 가능하다. 주로 겨울에 보리를 키워서 모내기 시점에 보리를 수확한 후 모내기를 한다. 논에 물을 대는 이유는 산소공급을 막아 잡초가 싹을 틔우지 못해 잡초 제거가 매우 쉬우며, 병충해가 적고, 벼를 고르게 심을 수 있기에 생산량도 직파법에 비해 우수하다. 다만 가뭄 해결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반도는 봄과 겨울에 강수량이 부족하고, 대부분 강수량은 여름 장마철에 집중된다. 가뭄 등으로 물이 부족할 경우 모내기를 할 수 없게 되면 농민들의 근심뿐만 아니라 왕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조선 중기까지 모내기가 활성화될 수 없었다. 저수지 등 치수 사업을 해야 하는데 기술과 자본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는 힘들었다. 따라서 고려말에 모내기 기법이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물이 풍부한 지방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뤄졌다.중국·일본의 성장
중국이나 일본은 우리보다 위도가 낮기 때문에 모내기를 하기 수월했다. 중국 강남 지방은 일찌감치 모내기를 하면서 벼의 생산량이 높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조조·유비·손권의 패권을 다퉜던 내용을 다룬 삼국지의 경우 손권이 강남땅을 개발했다. 사실 중국은 이때부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것은 모내기로 인해 쌀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먹을 것이 풍부해지자 그를 바탕으로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일본 역시 고려말에 모내기가 중국으로부터 전수됐는데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낮기 때문에 이앙법이 가능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전국시대로 접어들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광해군 시대부터 모내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기록상에는 영조와 정조 대 모내기를 허가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영·정조 시대 르네상스의 기반
즉, 영조와 정조 시대에 모내기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는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시대와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대를 문화적으로 가장 꽃을 피웠던 시기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영조와 정조 시대를 르네상스 시대라고 표현을 한다. 그 기반은 바로 이앙법 즉 모내기에 있다. 모내기를 하면서 쌀 생산량이 늘어났고, 농촌은 한층 부유해졌다. 부유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영조·정조 시대에 다양한 문화가 탄생했다. 문제는 농촌사회에 빈부격차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넓은 땅을 경작하는 광작과 그에 따른 부농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윤추구를 위한 영농의 형태로 진화한다. 18세기 중반 조선 전체 인구는 1800만명으로 세계 7~8위 수준이었다. 조선 초기인 16세기 인구가 1천만명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쌀 생산량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쌀 생산량이 증가하게 되면 농촌이 부유해지고 그에 따라 필요한 물품이 생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거래가 이뤄지는데 그 이전까지는 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지 못하면서 대도시 위주로만 상업 거래가 이뤄졌기 때문에 정부의 통제가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무역이나 상업 등에 대한 통제가 이뤄졌지만 영조와 정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상업의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정조 때 금난전권을 폐지했다.삼정의 문란 발생
또한 농사가 이제 더 이상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윤추구를 위한 영농 형태로 진화하면서 삼정의 문란까지 이어지게 된다. 양반이 그 이전까지는 유교적 이념을 갖고 유교적 이상향을 꿈꿨다. 그것은 검소하면서 군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쌀 생산량은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양반이나 백성이나 함께 잘살자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8세기 이앙법으로 인해 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농촌사회에 이윤 추구 하는 영농의 형태로 진화하면서 양반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됐다. 유교적 이념을 추구하는 과거의 양반이 더 이상 아니게 됐다. 그것은 19세기 세도정치가 되면서 매관매직을 통해 관리가 되고, 관리가 수조권 등을 통해 농민들을 착취하거나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민란이 발생했다. 농민들이 정부와 그의 양반들이 자신들을 더 이상 선정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반발을 한 것이다. 그렇게 구한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