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2일 나치독일, 연합군에 항복선언하다

2022-05-02     어기선 기자
독일로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5년 5월 2일은 나치독일이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독일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가 4월 30일 자살했고, 히틀러에 의해 후임 독일 대통령으로 임명된 해군 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을 수반으로 하는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소련군 대규모 공세에

1944년 여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로 바그라티온 작전 결과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완전히 붕괴됐다. 이에 독일군은 벨로루시에서 철퇴해 비스와 강을 경계로 소련군과 대치하게 됐다.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순식간에 프랑스를 해방시키면서 독일 본토를 노리기 시작했다.

1944년 소련군은 재편성에 들어갔다. 워낙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우리 독일군이 소련군을 패퇴시켰으니까 서부전선에서 영미군만 패퇴시키면 독일은 다시 영토를 되찾을 수 있다”고 오판을 했다.

이에 서부 영미 연합군에 대한 공세작전을 계획했다. 동부전선을 포기하고 서부전선에만 몰두한 것이 히틀러의 패착이었다. 그로 인해 동부전선은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이틈에 서방 연합군은 소련군에게 동부전선에서의 공격을 개시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받아들여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면서 베를린 점령은 소련이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많은 피해를 입은 서방 연합군은 흔쾌히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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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베를린 공략

이에 소련군이 베를린 공략에 들어갔다. 베를린 공략에 동원된 군대는 병력 250만명, 전차 6천250대, 전술기 7천500대, 각종 야포 4만문 등이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은 병력 70만명, 전차 1천519대, 전투기 2천대, 야포 9천문이었다.

다만 당시 독일은 동원된 남자들이 이제는 바닥을 보였기 때문에 16세 정도의 어린 청소년들로 채워야 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뤄졌고, 결국 독일군은 계속해서 전선이 무너졌다. 독일군은 더 이상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해 4월 말에는 베를린을 주변으로 소련군이 포위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히틀러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패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측근들이 탈출할 것을 요청했지만 자신은 베를린에서 죽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히틀러의 자살

결국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둘로 쪼개서 카를 되니츠에게 독일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독일 총리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를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마지막 식사를 마친 뒤 그녀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 자살 직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측근들에 의해 기름을 부어 화장됐다.

이후 소련군은 마지막 남은 제국의사당 공략에 들어간다. 엄청난 수의 소련군에 맞서 나치독일은 12시간 동안 저항을 하기에 이른다.

제국의사당에 소련군의 깃발이 꽂힌 날이 5월 1일 오전 한밤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독일군의 저항은 계속됐다.

결국 5월 2일이 돼서야 정식적으로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항복을 받은 후에도 소규모 전투는 이어졌지만 소련군은 베를린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사실상 유럽전선은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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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처리

이후 스탈린은 독일 동부 지역을 빠르게 점령해 가기 시작했다. 서부 영미군들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독일 서부 지역을 빠르게 점령한 것처럼 소련군 역시 빠르게 동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미소 냉전 시대로 전환됐다.

결국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와 자를란트가 떨어져 나간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분할 점령했고, 수도 베를린 역시 4개국 각각 구역을 분할해 주둔하였다.

결국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뉘어졌고, 베를린은 동서 냉전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독일은 통일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