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새마을운동과 슬레이트 지붕

2022-05-03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새마을운동의 상징은 ‘지붕’이었다. 농촌 지역의 지붕 풍경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농촌에 많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는 농촌의 변화를 상징하는 노래였다.

그러면서 슬레이트 지붕을 사용했다. 지금이야 석면의 위해성 때문에 석면 슬레이트 지붕은 그야말로 논란의 중심에 있었지만 당시는 석면의 위해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초가집이 250만 가구

1970년대 통계에 따르면 전국 250만 농가 대다수가 초가지붕이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초가지붕을 가난의 상징으로 여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을 갈때마다 가장 서글프게 생각되는 것은 수천년 동안 그대로 내려오는 농촌의 초가집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불과 몇년 후 초가집을 한꺼번에 없애는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왜 슬레이트 지붕이었을까.

당시 초가집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사실상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초가집에서 가장 불편한 것인 ‘지붕’을 교체하는 것을 중점에 뒀다. 기둥이나 벽면 등은 그대로 하더라도 지붕만은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정부도 느꼈고, 농민들도 느꼈다.

초가집이라는 것이 결국 볏집을 지붕에 얹히는 것인데 볏집이라는 것이 1년이 지나고 나면 썩기 때문에 매년 갈아줘야 했다. 또한 병충해가 들끓고, 비가 새기 일쑤였다. 농민들 입장에서 초가지붕만 없애도 그 불편이 상당히 해소되는 것이었다.

정부 입장에서도 초가지붕에 들어가는 볏집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면 그만큼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볏집을 쑤어서 소 먹이로 사용해도 되는 문제였다.

당시 흔했던 건축자재 슬레이트

이런 이유로 초가지붕부터 먼저 교체하는 작업을 했다. 그 당시 가장 흔한 건축재료가 슬레이트였다. 슬레이트는 금강(현 KCC)와 벽산에서 생산했으며, 이를 지붕으로 만들었다.

물론 기와 지붕도 있다. 하지만 초가집 기둥에 기와지붕을 얹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가벼운 슬레이트 지붕을 얹을 수밖에 없었다. 슬레이트 지붕이 당시 가장 교체할 수 있는 최적의 건축 자재였다.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라는 노래가 있다. 작곡가가 낚시를 하러 가던 도중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농촌의 모습을 보고 노래로 만든 것이 바로 님과 함께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에서 그림 같은 집은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집을 의미한다. 1970년대 중반 농촌이 그렇게 대변화를 보인 것에 대해 감회가 새로워 작곡한 노래가 ‘님과 함께’이다.

사진=픽사베이

남진의 님과 함께 노래

박정희 정권은 농촌주택개량사업을 세웠고, 1975년 10월까지 슬레이트나 기와로 바뀐 집이 143만 7천채에 달했다. 그만큼 초고속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슬레이트 지붕 개량은 정부가 공짜로 해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정부 지원금과 농민들의 저리 융자금으로 만든 지붕이었다. 당시 돈으로 벼 10가마 정도의 돈이 투입됐기 때문에 일부 농민들은 반발을 했다.

하지만 엄청난 농촌 가구들이 초가지붕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게 되면서 가장 짭짤한 재미를 본 회사들이 슬레이트 생산회사와 대리점들이었다. 그들은 슬레이트 지붕 매출로 인해 초고속 성장을 했다.

하지만 농촌 근대화의 상징인 슬레이트 지붕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석면이 1급 발암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애물단지가 됐다. 농촌 지역의 슬레이트 지붕이 교체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쉽지 않다.

슬레이트 지붕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필요한데 예산을 책정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