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4일 장영자·이철희 부부 어음사기 사건 구속

2022-05-04     어기선 기자
구속된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2년 5월 4일은 장영자·이철희 부부가 어음사기 사건으로 구속된 날이다.

1982년 발생한 경제 범죄 사건이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금융사기 사건이었다.

명성그룹 사건, 영동개발진흥사건과 함께 5공 3대 금융부정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베일에 싸여있었던 장영자

장영자는 베일에 싸여있던 인물이었다. 어음사기 사건 직전까지 엄청난 재력가로만 알려졌을 뿐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장영자가 어떤 식으로 돈을 벌었고, 사채시장의 큰손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장영자 형부 이규광이 증권 정보나 거물을 소개해주고 금전 관리법을 알려줬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인맥이 탄탄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남편은 이철희로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으로 박정희 시대 때 상당한 권력을 누린 인물이다. 이런 이유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도 역임한 바가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장영자 형부 이규광은 이순자의 숙부이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장영자의 사촌형부였다. 다만 차용애가 사망한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와 재혼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법적으로는 완전 남남이었다.

불교행사에 거액 뿌리고 다녀

1980년 7월 국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인 정도영 준장은 어느 여인이 군 부대 불교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거액을 뿌린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조사를 해본 결과 당시 나이 40세의 장영자였다. 엄청난 재력가 행세를 했지만 빚 독촉을 받는 상태였다는 것을 파악하고 각 부대에 ‘장영자를 조심하라’는 지휘 조언을 내렸다.

1981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인 이학봉은 유학성 국가안전기획부장에게 장영자 부부에 대한 첩보를 알려줬다. 유학성은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햇다.

1982년 4월 공영토건이 장영자에게 어음 사기를 당했다면서 진정서를 대한민국 검찰청에 제출했고, 검찰 내사 결과 어음 사기 관련 기업이 더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에 그해 5월 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장영자 부부를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고, 뒤이어 어음 사기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공개됐다.

전두환

자금압박 시달리던 건설업체들 찾아가

장영자는 주로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건설업체들을 찾아가 남편 이철희의 과거 경력을 들먹이면서 특수자금이라면서 현금을 빌려줬다. 그 대가로 업체들로부터 수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공영토건의 경우 빌려준 현금의 9배에 달하는 1천279억 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아냈다.

장영자 부부는 이렇게 받은 어음을 할인해서 생긴 돈을 다른 회사에 빌려주면서 똑같은 방식을 취했다. 받은 어음의 총액은 7천111억원이고, 6천404억원을 할인했다.

1980년 신군부가 부정축재자로 지목한 10명의 부정축재액 총액이 953억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7천111억원은 어마어마하다.

지금도 7천111억원은 대기업의 존폐를 결정짓는 액수인데 1982년 당시라면 어마무시한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 환산하면 대략 70조원 정도이다.

엄청난 규모의 사기 사건이면서 장영자가 전두환 처가와 얽히면서 배후에 청와대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사건으로 일신제강, 공영토건이 부도났다. 장영자 부부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형과 미화 40만 달러, 엔화 800만엔 몰수형, 추징금 1억 6천254만 6천740원이 선고됐다.

또한 장영자의 형부이며 영부인 이순자의 작은 아버지 이규광에게도 징역 1년 6개월 및 추징금 1억 원이 선고됐다.

그 외에 구속된 사람이 30여명에 이르렀으며, 장영자의 집에 침입해 물방울 다이아 등 1억 2천만원 어치를 훔친 대도 조세형을 잡은 사례로 장영자에게 50만 원을 받았던 경찰관 8명은 쫓겨났다.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은 장영자에게 코오롱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코오롱 건설을 팔려고 했지만 팔기 직전 장영자가 검찰에 연행되면서 화를 면했다.

장영자./사진=연합뉴스

금융실명제 거론

장영자 부부 사건을 계기로 5공 실세들이 물러나면서 노태우 세력들이 대거 중앙권력의 실세로 등장했다. 또한 민주정의당 당직 개편이 단행되면서 노태우 인사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은 장영자 부부 사건을 계기로 시중의 음성자금을 양성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두환에게 금융실명제 시행을 건의했고, 전두환도 이를 시행하려고 했지만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을 계기로 김재익 비서관이 사망하면서 금융실명제 실시는 뒤로 미뤄졌고, 끝내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3년 8월 12일 오후 8시 정각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장영자는 1991년 가석방 이후 1994년 140억원대 어음사기 사건으로 2차 장영자 사건을 저질렀고,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지만 2000년대 다시 구속되면서 3차 장영자 사건이 부각됐다. 2018년 출소 3년 만에 또 다시 6억원대 사기사건으로 구속되면서 4차 장영자 사건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