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칼럼] 삼성그룹의 도전과 위기(4) : 공업화전략과 삼성전자의 출범
2023-05-04 정인준
박정희 정부의 공업화 전략과 삼성전자
군사혁명 정부의 부정축재 추징 벌과금은 27개 기업 379억8백만환으로 그중 삼성그룹은 103억4백만환(전체 27%)으로 납부했으며, 호암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대응, 경제계의 대정부 창구로 1961년 8월16일 한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정부의 공업화 전략으로 첫째 방안(외자유치, 기간산업을 세워 수입대체 수출촉진 공업화) 과 둘째 방안(공업화에 앞서 대다수가 취업중인 농업 먼저 개발, 농촌의 구매력 증진)이 제시되었으나, 호암과 대부분 경제인들은 한국 경제 후진성 탈피를 위해 첫째 방안인 先 공업화를 지지하였다. 경제발전을 위한 공업화를 위해 정부는 토지명령을 시달하고, 경제인들은 정유(남궁련), 제철(이홍준,이정림), 시멘트(김성곤), 비료(이병철,정대o), 전기기기(이한원), 케이블(구인회) 공장을 건설키로 하였다, 호암 이병철은 1964년 8월27일 「한국비료공업」 설립 후 1965년 9월 일본정부 차관 4,390만$(삼성물산과 미쓰이 물산과 계약)를 도입, 울산에 100만평 규모 부지에 세계 최대 규모 단일 비료 공장(년산 36만톤)을 건설하여 1967년 4월20일 준공함으로써 한국은 1967년부터 비료 수출국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비료공장 준공 이전에 국내 정치인 모함에 의해 발생한 1966년 9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지분 51%를 정부에 헌납(산업은행이 최대 주주로 공기업화)후 경제계를 은퇴하면서 호암은 박정희 대통령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호암은 1년3개월 만에 다시 경영에 복귀하면서 신규 사업으로 전자사업을 하게 되는데, 1950년대부터 전자사업을 해온 금성사, 동양정밀, 대한전선 등 기존 전자업체가 반대했으나 1969년 1월13일 생산제품 전량 수출 조건으로 수원 45만평 부지에 삼성전자(산요전자 보다 5만평 넓은 부지)를 설립하게 된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회고록에서 「1967년 말 중화학공업에 관심을 쏟던 박정희대통령이 “이병철 회장에게 이제 중화학공업을 해보라고 해, 임자가 가서 물어봐”라는 지시를 전하자 이병철 회장은 청와대 방문, 박대통령의 “조선, 자동차, 전자공업중 하나를 해 보십시오”라는 제안에 이 회장은 전자공업을 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77-1981)에서 기계공업과 전자산업을 축으로 년 9.2%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어 전두환 정부가 1980년 12월 수출용이었던 컬러 TV의 국내 판매허용하고, 1981년 6월 컴퓨터, 전자교환기, 반도체산업을 국책산업으로 선포함으로써 정부의 유망산업 지원정책은 삼성 등 민간기업의 기술 및 경영혁신과 함께 한국경제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