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연애 그리고 결혼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연애는 서로 좋아해서 사랑을 나누는 관계 및 이에 수반되는 각종 행위를 말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결혼까지 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이것이 정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연애를 따로 하고, 결혼도 따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자유연애는 꿈도 꾸지 못하는 그런 시대가 인류사의 대부분이었다.
즉, 자유연애는 근대적 개념이었을 뿐 결혼제도가 가장 우선시 됐던 것이 인류사를 통틀어 대다수를 차지했다.
연애보다는 결혼
인류사를 통틀어 연애보다는 결혼을 최우선시했다. 그것은 가족 공동체로 경제적 공동체를 만들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원시시대에는 남성들은 사냥을 나가고 여성들은 과일 등을 채집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제도적 장치로 결혼이라는 것을 택했다.
남성들이 사냥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자녀를 부양하고, 집안의 물자를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함께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제도 즉 결혼이 필요했다.
남성은 여성에게 사냥감을 바치고, 여성은 남성에게 친자를 보장하고 물자를 관리하는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 이득이 되는 관계로 발전을 하면서 결혼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이는 결국 소유권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처음에는 남성과 여성은 자유분방한 결혼제도를 보였다. 즉, 언제든지 결혼하고 이혼하고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재산의 소유 개념과 친자 개념이 뚜렷해지면서 결혼제도가 더욱 엄격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원시사회는 모계사회였다. 아무래도 사냥은 ‘성공’할 때가 있고, ‘실패’할 때가 있기 때문에 가족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
그러던 것이 농업사회로 전환되면서 남성은 더 이상 떠돌이 신세를 하지 않아도 됐고, 힘든 농사일은 남성이 떠안고, 여성은 주로 집안에서 물자를 관리하거나 육아를 관리하게 되면서 그에 따라 역할 분담이 뚜렷해지고, 이에 남성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대국가로 접어들면서 전쟁이 빈번해지고, 그에 따라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는 입장이 되면서 남성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게 됐고, 그것이 가부장적인 사회로 전환되게 됐다.
노동생산력 증대와 자신의 보호 위해
고대국가에서 중세국가로 넘어오면서 결혼제도는 노동력 생산 증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런 이유로 결혼을 하지 않은 남녀가 있다면 결혼을 시키는 것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업무가 됐다.
플라톤은 저서 ‘법률’에서 35세가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는 어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시대에는 30세 이상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마을의 수령은 국가로부터 크게 혼쭐이 나야 했다.
하지만 ‘연애’=‘결혼’은 아니었다. 지금은 자유연애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결혼까지 이어지지만 중세시대에는 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해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지내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양은 르네상스 시기가 되면서 겨우 남녀의 사랑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양은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중세시대 귀족들은 그들만의 혈연 관계를 통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다.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무슨무슨 가문’과 결혼을 하는 것이 당연시했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결혼을 하는 의미가 무엇이냐라고 따질 수 있지만 당시의 잣대는 ‘가문’과 ‘가문’이 맺어지는 것이었다. 그 에는 결혼 당사자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자유연애는 근대에 와서
오늘날 자유연애와 결혼의 개념은 근대에 와서 정립된 것이다. 즉,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결혼까지 간 것이 근대에 와서 정립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가 돼야 자유연애가 나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결혼까지 가는 것이 이뤄졌다.
우리나라 소설의 소재로 ‘자유연애’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17년 춘원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서이다.
즉, 본인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연애는 일반 대중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00년도 안됐다는 것이다.
계급제가 무너지게 됐고, 집단주의 혹은 가족주의가 퇴색이 되면서 개인의 선택에 따라 연애가 이뤄지고, 그것이 결혼으로도 이어지게 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 정착된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농어촌 지역의 경우 집안 어른들끼리 사진 교환하고 난 후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랑이나 각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해서 첫날밤에 신랑과 각시 얼굴을 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근대적 개념의 결혼제도도 무너져
현대에 넘어오면서 근대적 개념의 결혼제도도 무너지고 있다. 연애를 해도 굳이 결혼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개념이 정착하고 있다.
1인 가구 시대가 되면서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결혼을 하더라도 이성끼리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끼리 결혼을 하는 등 결혼제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국가적으로 보면 노동생산력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지만 개인의 행복을 볼 때 기존의 결혼 개념은 이제 퇴색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