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비첩 제도 그리고 골육상잔
2023-05-16 어기선 기자
노비 증가는 ‘일천즉천’ ‘양천교혼’ 때문
조선시대 노비가 증가한 것은 ‘일천즉천’과 ‘양천교혼’이다. 즉, 부모 중 한 쪽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이고, 평민과 천민의 혼인도 허용했기 때문에 노비가 증가했다.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일천즉천이나 양천교혼을 하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그것이 가능해졌다. 이런 이유로 노비가 갑작스럽게 증가를 한 것이지 여종을 성노리개로 삼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시선이다.비첩 제도의 소생은
조선시대는 비첩 제도가 있다. 비첩(婢妾), 즉 여종을 자신의 첩으로 두는 것을 의미한다. 비첩 제도를 뒀다는 것은 여종을 단순히 성노리개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성노리개로만 생각했다면 굳이 비첩 제도를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여종을 첩으로 삼고 난 후 자식이 태어나면 비록 신분은 ‘노비’였지만 특별 대우를 해줬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양반의 자기비첩 소생을 종량(從良·여종이 낳은 양인의 아이는 양인이 되도록 함)하도록 했다. 특히 태종 때에는 할아버지의 비첩 소생, 즉 4촌까지는 종으로 부리지 못하게 했다. 성종 때 노비를 관장하던 장례원(掌隸院)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비첩 자녀를 부리는 일을 ‘잔상골육(殘傷骨肉) 즉 골육상잔이라고 표현했다. 4촌까지 종으로 부리는 것을 제한하면서 5~6촌까지 종으로 부리는 것을 금기시 하게 됐고, 명종 시기에는 5~6촌은 노비로 부릴 수 있게 한다는 정했다.양반 가문 입장에서는 재산이 줄어들어
양반 가문 입장에서 자기비첩 즉, 양반이 자기 소유의 여종을 첩으로 두는 것은 사실상 ‘재산’ 감소로 이어진다. 당시 노비는 재산이기 때문에 재산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양반 가문 자신들이 여종을 첩으로 두기 보다는 여종이 다른 평민 사람들과 혼인을 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기비첩 보다는 오히려 자기 소유 남종이나 평민과 혼인을 시키는 쪽을 선택하는 것을 선호했다. 물론 양반 가문이 여종을 첩으로 두는 제도는 존재했고, 비첩 제도는 구한말까지도 이어졌지만 단순히 양반이 여종을 성노리개로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비첩 제도에서 나타난다. 여종을 성노리개로 생각했다면 굳이 비첩 제도를 두지 않았고, 비첩의 소생을 종으로 부리지 않는 인식도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