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발해는 백두산 폭발로 멸망했나

2022-05-16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발해는 백두산 폭발로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떠돌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시기가 완전히 맞지 않는다. 발해고와 요사(요나라 역사)에 따르면 926년에 발해가 멸망했다. 현대 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백두산 분출은 946년 11월이다. 즉, 발해가 멸망한 후 20년만에 백두산이 분출한 것이다. 따라서 백두산 폭발이 발해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해 멸망 후 나라다운 나라가 없다가 1115년 금나라가 세워진 것을 보면 발해부흥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시선이다.

발해 멸망 미스터리

요사나 발해고 등 역사서 등에서 발해의 멸망과정을 살펴보면 925년 12월 21일 거란군이 출병을 한다. 925년 12월 29일 발해 요충지 부여성을 포위하고, 926년 1월 3일 부여성을 함락하고 926년 1월 9일 발해 수도 상경성을 포위한 후 1월 12일 발해가 항복을 선언한다. 발해가 15일만에 멸망했다는 것이다. 조선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 42일 걸렸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멸망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발해가 멸망하고 나라 다운 나라가 세워진 것이 1115년 금나라이다. 즉 200여년 동안 아무도 없는 볼모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발해가 멸망한 것이 백두산 폭발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백두산 폭발은 946년이고, 발해 멸망은 926년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완전히 맞지 않는다.
발해

개성에서도 들렸고, 화산재 구름 일본에서 포착

이때 백두산 폭발이 엄청났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전해진다. 450km 떨어진 개성에서도 폭발음이 들렀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화산재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에서도 화산재 구름이 목격됐다는 것은 백두산 일대에 화산재가 엄청나게 쌓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살 땅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유민 입장에서는 발해부흥운동을 해야 하는데 발해부흥운동을 할 수 있는 땅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만 946년 백두산이 분출하기 전에 계속해서 백두산 분화의 징조가 있었을 것으로 지질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발해유민, 고려 땅으로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발해 멸망 후 수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땅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934년 발해 마지막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수만호에 달하는 발해 유민이 고려 땅으로 넘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공산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충분히 만회 할만 했다는 것이다. 태조 왕건 역시 공산전투에서 패배를 하면서 군사력을 비롯해 노동력이 휘청 거렸다. 이에 고심을 하던 차에 발해 유민이 대거 유입된 것을 환영했다. 이런 이유로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하사했고, 이는 최상위 귀족으로 편입시킨다는 의미였다. 또한 거란이 선물한 낙타를 굶어죽이게 한 것 역시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유화책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만호라고 표기했는데 통상적으로 호(戶)라면 ‘가구’ 단위다. 즉, 부모와 자녀 둘만 있어도 4명이 된다. 수만호가 고려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최소 4만명 이상이 고려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역사학자들은 10~20만 명 정도의 발해유민이 고려 내부로 유입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발해가 고구려 유민 대조영에 의해 세워진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발해부흥운동이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땅으로 이민을 했다는 것은 발해땅이 그만큼 사람 살기 부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는 백두산 폭발 전이었지만 수많은 징조가 보이면서 발해유민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이에 고려땅으로 넘어간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충분하다. 실제로 고구려나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계속해서 부흥운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발해만은 부흥운동 기록이 없다. 오히려 발해유민들이 고려땅으로 넘어갔다는 기록이 남은 것은 백두산 폭발 전조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기 충분하다.
고려

백두산 폭발 멸망설은 누가

백두산 폭발 멸망설은 1990년대 일본 마치다 히로시라는 학자가 940년 백두산이 폭발해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됐다는 설을 주장했다. 일본 지층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의 화산재를 발견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1990년대말 우리나라 공중파 방송들이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컴퓨터 그래픽까지 재현했다. 그러다보니 백두산 폭발로 인해 발해가 멸망했다는 학설이 기정사실화 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발해 멸망 연도와 백두산 폭발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고 20년이라는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두산 폭발 멸망설은 이제 학계에서는 완전히 폐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