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서울역사박물관, 대동여지도 등 100여점 전시
2023-05-20 어기선 기자
김정호, 실제로 전국 돌아다니면서 실측했나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의 작품이다. 김정호는 조선 후기 지도학자이면서 측량학자, 지리학자이다. 김정호에 대한 몇가지 오해들이 있다. 우선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실측을 했느냐는 것과 두 번째로는 지도 제작을 했다는 이유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을 당하고, 모든 지도가 불태워졌냐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 특별하게 추정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거꾸로 조선왕조가 김정호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호가 한반도를 3번이나 돌고,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며 정확하게 실측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설명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는 최남선이 “지도가 흥선대원군 때문에 사라졌다”는 말과 맞물리면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비쳐졌다. 하지만 김정호에 대해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들을 살펴봐도 직접 다니면서 실측했다는 말은 없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전에 만들었던 지도 ‘청구도’ 서문(序文)인 최한기 ‘청구도 제’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찾고 수집, 열람하였다”고 기록돼있다.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에서는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며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했다”고 기록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조력자가 신헌이다. 신헌은 규장각 등 나라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지도와 관련된 자료를 모두 찾아서 김정호에게 제공해줬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도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했다”는 기록뿐이었다. 어디에도 직접 발품을 팔아가면서 실측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울러 김정호의 가정형편이 썩 좋은 집안은 아니다. 이는 직접 발품을 팔아가면서 지도를 제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금도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기에는 경제적으로 힘든데 그 당시는 더욱 그러했다. 더욱이 자금을 지원해주는 스폰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대원군이 진노해서 김정호 죽였다???
또 다른 가짜뉴스는 대원군이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하자 진노해서 김정호를 죽였다는 이야기다. 당시 쇄국 정책을 취하던 흥선대원군이 김정호가 나라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김정호 부녀를 감옥에 가뒀고, 결국 김정호는 옥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호가 대원군 눈밖에 나서 옥사를 했다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원원일기 등에 기록돼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조선은 ‘기록의 나라’이다. 즉, 사소한 것까지 모두 기록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현대 대한민국보다 더 기록에 충실한 나라였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실제 사례로 태종 이방원이 왕이던 시절 사냥에서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사관에게 말에서 떨어진 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요구하자 “왕이 말에서 떨어진 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라는 것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했다. 다시 말하면 김정호 부녀가 대원군 눈밖에 나서 옥에 갇히고 옥사를 할 정도가 되면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김정호 제작의 실질적 지원자인 신헌은 규장각이나 비변사에서 국가 중요 기록까지 김정호에게 제공했는데 만약 김정호가 옥사를 했다면 신헌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인데 그런 기록은 아예 없다. 흥선대원군 눈밖에 나서 김정호 부녀가 옥사했고, 대동여지도가 불에 탔다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어 독본’에 나온 내용이다. 조선인들(대원군 등)이 버린 김정호 지도 가치를 일본인이 발견하고 러일전쟁에 기여했다는 내용이다. 게다가 대동여지도 목판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는 점이다. 즉, 대원군이 불태웠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훗날 역사가 중 일부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판적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또한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지도 인식이 전근대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가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흥선대원군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거나 알았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