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바이든 방한, 엘리스 루스벨트 방한

2023-05-23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이번 방한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11일 만에 이뤄진 방한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평가이다. 또한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의 국빈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은 엘리스 루스벨트가 처음이다. 대한제국 당시 고종황제는 엘리스 루스벨트를 ‘공주’라고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막장 행동은 그야말로 막장 그 자체였다.

루스벨트 딸, 조선땅 방문

루스벨트 대통령은 두 명인데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1909년)와 프랭클린 루스벨트(1933년~1945년)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딸과 관련된 내용인데 1905년 9월 19일 증기선 만추리아호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한 엘리스 루스벨트이다. 당시 고종황제는 "미국 대통령의 딸이라고 그러면 공주로군"이라고 생각하고 엘리스 공주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당시 황실 악단이 미국 군가를 연주하면서 열렬 히 환영했고, 엘리스는 화려한 황실 가마를 타고 입궁해 덕수궁 안에 있던 대한제국 최고급 숙소 돈덕전에 묵었다. 고종황제가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대한 것은 절박한 상황 때문이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줄 방파제인 러시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제국은 마지막 희망으로 미국을 선택햇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타국의 위협에 서로 힘을 합쳐 대응한다'는 조미수통상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종황제는 미국이 일본을 견제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명성황후의

막장 행동 보인 엘리스 루스벨트

이런 이유로 고종황제는 제물포에서 특별열차로 엘리스를 서울로 오게 했고, 황실 가마를 제공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최고의 예우를 갖춘 환대였다. 하지만 엘리스 루스벨트는 대한제국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막장 행동을 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평소에도 엘리스에 대해 통제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엘리스의 막장 행동은 고종 황제의 왕비인 명성황후 무덤을 밟고 올라선 것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고종 황제는 엘리스를 위해 궁중에서 초청 연회를 베풀고 명성황후 능인 홍릉에서 연회를 베풀게 했다. 그 의도는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죽음을 엘리스가 알게 해서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엘리스는 승마복을 입은채 말을 타고 등장했다. 다른 나라 왕비가 묻힌 곳을 연회복도 아닌 승마복을 입고 나타났다는 것은 엄청나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또한 엘리스는 홍릉의 석마와 석양에 올라타고 장난을 치며 황실을 욕보였고, 남자친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를 쳤다. 그날 같이 있었던 크뢰벨은 "나도 서양의 생활 양식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그녀가 입고 나타난 복장은 이해할 수 있는 수위를 넘었다. 더군다나 국빈 대접 받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굴 수 있을까"라고 기록했다. 또한 "엘리스 공주는 한국의 전통과 한국 황실의 역사와 존재를 전혀 개의치 않았던 오만 무도한 미국의 공주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에 대해 엘리스 일가와 진실공방을 벌였는데 100여년이 흐른 시간에 홍릉 석조상에 올라탄 엘리스의 모습이 미국 토널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되면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엘리스

엘리스가 깔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엘리스가 이처럼 대한제국 황실을 깔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엘리스 순방단이 일본을 먼저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일본 당시 수상이었던 가쓰로 타로를 만나 비밀협약을 했기 때문이다. 일명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고, 그 대가로 필리핀의 미국 지배를 인정한 밀약이다.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고종 황제는 엘리스 일행에 융숭한 대접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엘리스 일행은 고종황제에 대해 냉소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무례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엘리스 일행이 떠난 후 일본은 고종 황제를 압박해서 강제 조약을 맺었는데 그것이 바로 을사조약이다. 그리고 을사조약을 맺은 해 같다는 말이 오늘날에는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