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주점

2023-05-25     어기선 기자
조선시대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이후 주점 등에 대한 신용카드 이용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신한카드가 지난 9~19일 업종별로 개인 신용카드·체크카드 이용건수 현황을 전월 동비(4월 11~17일), 전년 동기(2021년 5월 10~16일)와 비교한 결과, 주점의 카드이용건수가 지난달 같은 기간 대비 60%,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8% 늘어났다. 거리두기 해제로 인해 보복소비 심리가 발동하게 됐고, 또한 새벽까지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주점의 신용카드 이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김유신, 말목 자른 사연

사실 주점 즉, 술집이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것이 바로 ‘술’이고, 그 술을 파는 장소 즉 술집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역사와 함께 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나라 최초의 술집에 대한 기록은 김유신 장군이다. 김유신 장군이 천관이라는 술집의 여자 즉 천관녀와 만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김유신 장군의 어머니가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런데 김유신 장군이 술을 마신 후 말에 올라탔는데 천관녀 집에 도착하자 이에 김유신 장군이 말의 목을 잘랐다는 기록이다. 물론 역사학자 일부는 천관녀가 금관가야 출신의 왕족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기록 상에는 ‘기녀’라는 말이 있다. 즉, 그것은 천관이라는 술집에 있는 여성이라는 뜻이 된다. 고려 성종 2년에는 주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후 주점, 주가, 주헌, 주루 등의 명칭으로 술집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주루는 지붕 위에 중층 누각이 달려 있는 술집이라는 뜻이다. 성종 2년 주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건원중보라는 동전 즉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한 것이다. 개성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고려 정부가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유통시키기 위해 개성에 술집을 차린 것이다. 무신 정권 당시에는 술집에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반란을 꾀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주막 중심으로

조선시대라고 다르지 않았다. 한양에는 다양한 술집이 있었지만 주로 양반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이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역(驛)’과 ‘원(院)’이 있었는데 ‘역’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이 말을 바꿔 타는 공간이었고, ‘원’은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17~18세기 들어서면서 일반사람들도 여행을 하게 됐다. 일반사람들도 여행을 하다보니 일반사람들을 대상으로 숙박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막이 탄생한 것이다. 초반에는 숙박을 주요 업으로 삼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술을 팔기 시작하면서 숙박과 주점의 역할을 함께 하게 됐다.
구한말

목로주점·내외주점 등 나타나

18세기 농업생산량이 대폭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술집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대표적인 술집이 목로주점이다.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 즉 목로에 안주를 늘어놓고 술을 팔았다고 해서 목로주점이다. 보통 술을 잔 단위로 팔았으며 무료 안주가 한점씩 붙었다고 한다. 목로주점을 선술집이라고 불렀는데 서서 술을 마신다고 해서 ‘선술집’이다. 내외술집 일명 팔뚝집이다. 병자호란 이후 고향에 돌아온 여인이나 남편이 일찍 죽음을 맞거나 혹은 시댁으로부터 쫓겨난 여인들이 생계 수단으로 삼은 것이 바로 내외술집이다. 술집 주인인 여인과 손님인 남자와의 내외를 한다고 해서 내외술집이다. 여인은 방 안에서 술과 안주를 바깥으로 살짝 내밀어 놓으면 남자 손님들이 그것을 자신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 방식이다. 이런 이유로 남자 손님은 주점의 여주인의 얼굴을 절대 볼 수 없었다. 또한 여인은 방문을 조금만 열고 팔을 내밀어 술을 따라줬기 때문에 ‘팔뚝집’이라고 불렀다. 색주가는 창부를 끼고 마시는 술집이고, 모주집은 술찌거기를 걸러낸 모주에 비지 같은 싸구려 안주를 파는 집을 말한다. 노천술집은 말 그대로 길가나 거리에서 술을 잔 단위로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