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26일 부산정치파동
2023-05-26 어기선 기자
두 개의 자유당 탄생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그해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면서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했고, 간접선거를 통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950년 5.30 총선을 치렀는데 한민당 후신인 민국당은 그야말로 충격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총선 결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과 무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당선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승만 정부와 국회는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피난갔다. 문제는 1951년 초 국민방위군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고, 2월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민의는 상실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해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자 다급한 민국당은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전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연임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연임을 위해서 이 전 대통령이 꺼낸 카드는 ‘거대 여당’을 만드는 것과 직선제 개헌안이었다. 이에 신당 창당을 추진했는데 원외와 원내 신당을 창당하기로 했다. 이에 원외 신당은 착실하게 창당되고 있었는데 문제는 원내 신당은 쉽지 않았다. 원내 신당은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가 통합해 만든 공화민정회가 중심을 이뤘다. 문제는 신정동지회가 국민방위군 사건에 연루되면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됐고, 공화구락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각책임제’를 들고 나왔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원외 신당과 내각제를 추진하는 원내 신당으로 추진됐는데 공교롭게도 두 정당 모두 ‘자유당’을 내걸었다. 이에 원외 자유당과 원내 자유당으로 나뉘게 됐다.이대로 가면 연임 불가
제헌 헌법은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이대로 간다면 이 전 대통령이 연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1951년 10월부터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그리고 1952년 1월 18일 국회에서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지만 전무후무할 압도적인 표차이로 부결되면서 이승만의 꿈은 무너졌다. 찬성표가 19표였는데 원외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 20명인 점을 감안하면 딱 원외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진 셈이다. 부결이 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국회의원을 소환해야 한다는 벽보가 붙기 시작했다. 물론 훗날에 알려진 것이지만 원외 자유당에서 동원한 결과였다. 원외 자유당은 ‘애국단체’라는 단체를 만들어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였다. 이같은 소환운동을 벌이자 원내자유당은 국회의원 123명의 서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또 다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4월 25일 시·읍·면의회의원 지방선거가 실시됐고, 5월 10일에는 서울·경기·강원을 제외한 지역에서 도의원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해당 지방선거에서 원외자유당,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 친이승만 세력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했다. 그 이유는 전쟁 중에 치러진 지방선거이기 때문에 경찰과 관권을 동원했기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선거였다. 지방의회가 구성되면서 이 전 대통령은 국회를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규탄대회였다.규탄대회 열어
지방의회를 친이승만 세력이 장악하면서 이들 조직을 바탕으로 규탄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당시 주민들을 어떤 식으로 동원했냐 하면 만약 규탄대회에 나오지 않으면 쌀 배급을 하지 않겠다고 협박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시민증을 빼앗아 집회 참여를 강제했던 것이다. 1952년 5월 21일, 23일 규탄대회가 열리면서 점차 폭력화로 변화했다. 국회는 이승만 정부에게 폭력사태의 책임을 추궁했지만 정부는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24일에도 관제 데모가 계속됐고, 관제데모에서 국회의원을 탐욕의 위정자 등으로 규정하면서 숙청을 위해 구국운동을 전개하겠다고 결의했다. 그 결의가 이 전 대통령에게 전달되자 “민의라면 의거하여 행동을 취하겠다”고 밝혔다.친위쿠데타 발발
24일 이같은 결심은 결국 25일 0시를 기점으로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게 했다.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26일 새벽 헌병들은 원내 자유당 의원들을 체포 연행했는데 45명이었다. 물론 대부분 풀려났지만 임흥순, 이용설, 서범석, 김의준 의원은 구속 수감됐다. 이후에도 계엄령 기간에 헌병대의 국회의원 체포는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당시 국회 회기 중이었기 때문에 국회의원 체포는 불법이었지만 이미 법은 쓰레기통에 버려진지 오래다. 5월 28일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도 계엄령 해제와 국회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해제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성수 부통령은 부통령직에서 사임을 했다. 그러자 내무부와 치안국이 ‘정부혁신위원회사건’을 발표했다. 그것은 선우종원이 전직 남로당원들과 함께 이승만, 이범석을 암살하고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같은 발표에 이 전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같은 혼란이 거듭되자 미국은 초반에는 비상계엄령을 해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지만 결국 나중에 비상계엄령을 인정하게 됐다. 초반에는 전쟁 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나라가 어딨냐면서 이 전 대통령에 비난을 가했지만 전쟁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비상계엄령을 묵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발췌개헌안 통과
결국 장택상 국무총리가 타협안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이 전 대통령이 주장하는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채택하고, 대신 내각책임제 요소가 들어가는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에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권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결국 6월 21일 발췌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개헌안은 국회에 상정하기 전에 30일간 공고해야 하지만 법적 절차는 무시됐다. 7월 발췌개헌안에 대한 국회 심의가 이뤄졌는데 이승만 정부가 국회의원들을 너무 많이 체포·구금하면서 의원정족수가 모자르게 됐다. 이에 경찰들이 피신 의원들을 붙잡아 강제로 등원시켰다. 7월 4일 국회가 열렸고, 결국 발췌개헌안이 통과됐다. 이날 개헌안 통과는 이승만 정부의 협박과 공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5월 26일 시작된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 정부가 ‘국회 해산’이라는 협박을 계속 하면서 7월 4일 발췌개헌안 통과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