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우리나라에서 화교가 크게 위축된 이유

2022-05-26     어기선 기자
사진=펙셀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화교라고 하면 청나라 말기부터 식민지 대만, 중화민국(대만),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다만 1990년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한 사람을 중국인이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대만 출신 이주민을 ‘화교’라고 부른다. 중국 내 한민족 출신으로 우리나라에 이주한 사람을 ‘조선족’이라고 불렀는데 최근에는 ‘중국 동포’라고 부른다.

청나라 말기부터 본격 이주

화교의 시작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이다.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대를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가 인천 제물포를 통해 들어왔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청나라 군대 잡일을 도와주는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땅에 들어와서 상업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화교의 시초이다. 그때도 짜장면이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해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짜장면이 만들어졌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에 승리를 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수교가 끊어졌다. 이에 화교 상인들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1905년 을사조약을 거쳐 일본제국주의에 강제로 병탄되는 과정을 거쳤는데 그 사이에 청나라 역시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화교 견제했던 일제

중화민국이 일본과 새로운 수교를 맺게 되면서 화교가 대거 우리나라에 유입됐다. 그러자 일본은 자국 상인들이 조선땅에서 힘을 갖기 위해 화교 상인 즉 화상을 일부러 견제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포목상 등을 중심으로 견제를 하면서 화교들은 한약상이나 청 요릿집으로 업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청 요릿집을 차릴 수 없는 화교인들은 날품팔이 노동자가 돼야 했다. 그러다보니 조선인들과 노동력 경쟁을 해야 했고,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면 본토로 송금을 했다. 1930년대 독립운동이 점차 거세지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의 반중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반중 감정을 확산시키면 반일 감정이 줄어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더욱이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국민당 등 중국 내 정당과 친분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 땅에 있는 화교인들과 조선인들과의 갈등을 부추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에 유언비어 유포를 부채질 했고, 언론사들은 오보 사태를 터뜨렸다. 이에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났는데 1927년, 1931년 등이 대표적이고 특히 1931년 평양화교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평양에서 약 120여명의 화교가 폭동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화교 4천여명은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했고, 6만까지 올라갔던 화교인들이 3만으로 줄어들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의거를 거행하면서 우리 국민과 화교인 사이에서의 앙금이 해소됐고, 다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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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군정은 중화민국 사람들이었던 화교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를 보였다. 그러자 화교인들은 중계무역을 독점했다. 1946년 전체 무역량 82%를 화교인이 차지할 정도였다.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본토에 세워지면서 우리나라에 있던 화교인들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됐다. 그런 상황 속에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창고봉쇄령이 내려졌고, 중계무역을 하던 화교인들이 타격을 입었다. 이에 중계무역을 포기하고 요식업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많은 화교인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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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개혁 그리고 토지 소유 금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한 후인 1962년 두 가지를 단행하면서 화교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이다. 당시 화교인들이 엄청나게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일부 화교인들은 농사를 지었다. 이에 ‘화농’이라고 불렀는데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조치를 단행하면서 이들이 더 이상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됐고, 헐값에 땅을 팔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화폐개혁이다. 화폐개혁은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킨 조치를 말한다. 박정희 군부가 화폐개혁을 단행한 것은 화교가 보유한 자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박정희 군부는 화교가 보유한 자금을 끌어들여 경제개발을 하려고 했다. 이에 1962년 6월 9일 밤 10시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한다. 화폐 단위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고 10환=1원으로 한다는 내용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6월 10일 이전 발행된 수표나 어음 또는 우편환 증서는 금융기관에 신고해야 하고, 7월 17일까지 신고하지 않으면 무효로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하면 화교의 장롱에 있던 자금이 시중 은행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것을 경제개발 자금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 엄청난 혼란만 가중하게 됐다.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6월 17일까지 예입된 총액은 1873억환인데 이중 1582억환은 환화이고 나머지 291억환은 수표 등이었다. 당시 화폐발행액이 1653억환이었기 때문에 71억환만 회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지하자금을 양지로 꺼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화교인들은 당시 현금을 장롱에 숨긴 것이 아니라 금 등 안정자산을 숨겼기 때문이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됐고, 미국이 불 같이 화를 냈다. 화폐개혁을 위해 예금계정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봉쇄를 풀지 않으면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박정희 당시 의장은 실패했다고 자인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화교인들은 우리나라를 뜨고 대만으로 갔다. 화폐개혁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혼란이 일어났지만 만약 당시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와 화폐 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화교인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오늘날 대기업 중에는 화교 출신 회장이 생겼을 수도 있다.

1990년 중국과 수교·대만과 단절

화교인들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1992년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명동에 있던 대만 대사관이 중국 대사관으로 바뀌게 됐다. 화교인들로서는 ‘청천백일기’ 대신 ‘오성홍기’가 나부끼는 것을 보면서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러면서 중국인들이 대거 우리나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화교인들은 중국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화교인들의 입김이 상당히 컸지만 1990년대 이후 중국인들이 대거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화교인들의 입김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당당하게 화교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시기가 도래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예인 중 일부는 자신이 화교 출신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혔다. 물론 1990년대에도 당당하게 밝힌 연예인들이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서 자신이 화교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는 연예인들이 사라졌다. 오히려 중국인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