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30일 잔다르크 화형 당하다

2023-05-30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431년 5월 30일은 프랑스 성녀 잔다르크가 화형 당한 날이다. 잔다르크가 프랑스에서 성녀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 이전까지 없었던 ‘프랑스’라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주의가 붕괴되고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잔다르크의 역할은 단순히 백년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가 근대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복잡한 관계

프랑스는 1337년 5월 24일부터 1453년 10월 19일까지 영국과 백년전쟁을 치렀다.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에 관한 전쟁이었다. 당시는 민족주의가 크게 고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이 프랑스 왕위계승에 상당한 간섭을 했던 시기였다. 이에 프랑스와 영국 간의 백년전쟁이라고 하면 ‘앵글로색슨족’인 영국과 프랑크족인 ‘프랑스’와의 민족 전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영국 왕실-영국 봉건귀족들과 프랑스 왕실-프랑스 봉건귀족들 간의 다툼에 불과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발루아 왕실이었는데 샤를 6세가 젊었을 때 정신병이 걸려 왕 노릇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내부에서 내전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이 쳐들어 온 것이다.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지만 승부를 제대로 내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과 친영파 프랑스 귀족들(부르고뉴) 간에 1420년 트루아 조약이 맺어졌다. 조약 내용은 영국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 공주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샤를 6세 사후 프랑스와 영국의 공동군주가 된다는 것이었다. 샤를 6세가 병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영국은 판단을 했고, 친영파 프랑스 귀족들도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진=픽사베이

위기의 프랑스

친영파 프랑스 귀조들은 영국군에게 수도 파리의 성문을 열어주고, 샤를 6세를 이을 샤를 왕세자(훗날 샤를 7세)는 반영국 프랑스 귀족들과 함께 시농으로 쫓겨가게 된다. 문제는 영국 헨리 5세가 샤를 6세보다 먼저 죽었다는 점이다. 곧이어 프랑스 샤를 6세도 사망을 하면서 헨리 6세가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데 만 1살에 불과했다. 만 1살짜리 왕이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군주로 군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에 헨레 5세 동생인 베드포드 공작이 섭정한다고 나섰다. 그러자 프랑스에 있던 상당수의 귀족들이 반대하고 나섰고, 그러자 샤를 왕세자(샤를 7세)가 그들을 설득해서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과 친영파 프랑스 귀족들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프랑스 북부가 모두 점령 당하고 대관식이 열리는 랭스까지 점령당했다. 샤를 왕세자 입장에서는 대관식을 해야 프랑스 왕이라는 정통성을 얻게 되고 귀족들과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랭스를 되찾아 와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친영파 프랑스 귀족들은 공세를 펼쳤고, 1428년 샤를 왕세자의 주요 핵심 도시 중 하나인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함락 위기 오를레앙 그리고 잔다르크 출현

오를레앙이 함락되면 사실상 샤를 왕세자와 반영파 프랑스 귀족들은 끝나게 되고, 프랑스 전역은 영국의 통치로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었다. 오를레앙은 조건부 항복의사까지 밝혔지만 영국과 친영파 프랑스 귀족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오를레앙이 함락되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그때 잔다르크가 출현했다. 잔다르크는 양치기 소녀였는데 어느날 하나님으로부터 위기의 프랑스를 구하고 샤를 왕세자의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말씀을 듣고 샤를 왕세자를 찾아가 설득을 하고 군대를 받아냈다. 그리고 영국군과 친영파 프랑스 귀족 군대를 박살내고 오를레앙을 구해냈다. 또한 파테 전투에서는 영국 최고 명장 존 탈보트를 포로로 잡았고, 랭스를 함락시켰다. 랭스를 찾아오면서 샤를 왕세자는 대관식을 할 수 있었고, 샤를 7세로 등극했다. 그 이후에도 수차례 전투를 벌였고, 그때마다 승리를 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파리 공성전 그리고 체포

이후 잔다르크 군대는 수도 파리를 되찾기 위해 전투를 벌였지만 샤를 7세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파리를 함락시키는데 실패를 했다. 잔다르크 군대가 오를레앙을 해방시키고 랭스를 함락시킬 때만 해도 샤를 7세에게 잔다르크는 ‘구원자’였지만 전투를 하면 할수록 샤를 7세에게 잔다르크는 정치적 경쟁 상대이면서 부담이 됐다. 왜냐하면 프랑스 국민들은 하나님께서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성녀를 내려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샤를 7세 입장에서는 왕권을 위협하는 소녀에 불과했다. 만약 그런 상황 속에서 잔다르크 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나면 프랑스 국민들은 샤를 7세를 끌어내리고 잔다르크를 왕에 앉힐 수도 있다고 샤를 7세는 생각했다. 이에 파리 공성전에서 샤를 7세 군대를 일찌감치 철수시켜버렸다. 그러다보니 잔다르크 군대로만은 파리를 함락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에도 샤를 7세가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서 결국 잔다르크는 영국에 붙잡혔다.
루이

왜 하필 이단재판이었을까

영국에 붙잡힌 잔다르크는 이단재판을 받았다. 흔히 마녀재판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이단재판이었다. 영국이 왜 잔다르크를 이단재판에 넘겼냐 하면 샤를 7세의 정통성을 깎아 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단으로 판명되면 잔다르크에 의해 대관식까지 치렀던 샤를 7세의 정통성이 흠이 가게 되면서 프랑스 국민들이 샤를 7세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첫 번째 재판에서 70여명의 이단 심판관들은 잔다르크에게 패배를 했다. 이것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단 심판관들이 잔다르크와 설전을 통해 망신주기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샤를 7세의 정통성을 깎아 내리게 하기 위해서 공개 재판을 했는데 오히려 이단 심판관들이 잔다르크와의 설전에서 패배하면서 프랑스 국민들은 오히려 진짜 하나님이 프랑스에 보낸 성녀라는 인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다급한 영국은 비공개로 돌렸고, 결국 이단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그 방법으로 잔다르크를 군사 감옥에 가둬났고 여자 옷을 입게 하고서는 병사들을 보내 위협을 가했다. 잔다르크는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었다면서 마녀로 몰려고 했었다. 결국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다르크는 남자 옷을 입었고, 그것이 빌미가 돼서 이단으로 몰렸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샤를 7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포로 교환은 당시 비일비재했고, 그것이 당연시 했다. 영국도 샤를 7세에게 포로교환을 하자고 요청했지만 샤를 7세는 침묵했다.

화형 이후

결국 1431년 5월 30일 화형 당했다. 이것이 오히려 프랑스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게 했다. 그 이전까지는 ‘프랑스’라는 개념이 약했다. 그저 자신들은 농노 즉 봉건영주에 예속된 그런 사람들로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잔다르크가 나타면서 프랑스 국민들은 애국심이 고취됐다. 그러면서 점차 봉건영주 즉 기존 귀족으로부터 벗어나 왕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 즉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샤를 7세는 삼부회를 바탕으로 봉건영주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킨 대신 평민 그룹의 위상을 대폭 상승시켰다. 그러면서 기존 봉건영주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귀족들이 탄생하게 됐다. 프랑스는 빠른 속도로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짐이 곧 국가다’는 루이14세가 탄생하는 등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기틀이 샤를 7세와 잔다르크에 의해 이뤄졌다. 만약 잔다르크가 없었다면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라는 민족의식이 고취되지 않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중앙집권화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영국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가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이후에도 계속해서 중앙집권국가가 프랑스에 나올 때마다 잔다르크는 회자됐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자신의 황제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잔다르크를 인용하기도 했다. 한편, 샤를 7세는 25년이 지난 후 잔다르크의 복권 재판을 요청했다. 그때는 이미 샤를 7세가 프랑스 전역에서 영국군을 몰아낸 시점이다. 잔다르크를 복권 시켜야 자신이 마녀에 의해 등극한 왕이 아닌 성녀로부터 등극한 왕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