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부르주아

2022-05-30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부르주아는 칼 맑스의 이른바 마르크스철학에 나오는 개념으로 많은 자본을 가진 유산계급을 말한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원래 자유도시민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 것이 프랑스 역사의 두 차례 변혁기를 통해 상류층 계급이 되면서 벼락출세를 한 도시민을 뜻하는 말이 됐고, 그것이 19세기 칼 맑스에 의해 유산계급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부르주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봉건영주제와 중앙집권 그리고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 등을 이해 해야 한다.

봉건영주와의 관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봉건영주 체제로 들어갔다. 중앙에 왕이 있지만 실질적 권한은 없었고, 봉건영주가 자신의 영토를 지배하는 방식이었다. 봉건영주는 자신의 농지인 장원을 관리했고, 봉건영주는 농노를 통해 장원에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것이 장원 주변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성곽을 쌓고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도시라고 하면 오늘날의 대도시 등을 생각하기 쉽지만 일종의 마을과 같았다. 그들은 도시에서 상업도 하고 대장장이 등 공업활동도 했다. 그것을 burg(부르그)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기에 상주하는 상공업을 하는 사람들을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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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의 백년전쟁으로 위상 바뀌어

그런데 프랑스가 영국과 이른바 백년전쟁을 치르게 됐다. 백년전쟁을 치르면서 잔다르크가 나타났고, 전쟁은 급격히 프랑스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잔다르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가 영국에 밀렸다. 사실상 프랑스가 영국에 넘어갈 뻔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잔다르크가 나타나면서 전쟁의 상황은 뒤바뀌게 됐고, 그로 인해 귀족들의 입김이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봉건영주 밑에 있었던 도시민들의 위상도 바뀌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삼부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왕, 귀족, 그리고 평민으로 구성된 회의체였다. 이것이 샤를 7세 이전까지만 해도 형식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봉건영주 귀족들의 입김이 거셌기 때문에 삼부회를 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잔다르크가 나타나고 난 후 프랑스 국민들 특히 봉건영주 밑에 살고 있었던 도시민들 사이에 ‘민족의식’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기 싫다는 의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샤를 7세는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를 소집해서는 이들 도시민들에게 직접 세금을 걷겠다고 선포하고, 도시민들 역시 봉건영주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왕에게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했다. 대신 관료로 발탁되거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샤를 7세는 이들 도시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었는데 이른바 '자유사수대'였고, 자유사수대로 영국군대를 프랑스 전역에서 몰아내면서 중앙집권 국가로 빠르게 전환됐다. 이러자 프랑스 내에서는 빠른 속도로 귀족들이 몰락하고 부르주아지가 신흥 귀족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영국에는 젠트리 계급이 영국 의회를 차지했다면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신흥 귀족으로 나선 것이다.
금곡대로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

하지만 여전히 기존 귀족들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상공업이 자유도시 중심으로 발달을 했지만 여전히 농업 생산량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들 역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기존 귀족들과 계속 결탁을 해왔다. 하지만 상공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부르주아지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존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도시민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싹틔우기 시작했고,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젠트리 계층이 기존 귀족들과 결혼 등의 화합으로 의회 권력을 무혈로 차지했다면 프랑스는 부르주아지가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의회권력을 사실상 무력으로 장악하게 됐다. 그러면서 귀족은 실권도 특권도 없는 단순 명예직위가 됐다. 문제는 부르주아지는 여러 분파로 나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왕정 복고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공화정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갈등을 보였고, 나폴레옹이 혼란스런 정국을 수습해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정 복고를 주장하는 부르주아지는 귀족 계급으로 편입되면서 신흥 귀족이 됐다. 기존 대토지 귀족들과 달리 상업 자본가들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벼락출세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기존 귀족들은 혈통이나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바탕으로 귀족 행세를 했다면 이들 부르주아지는 ‘돈’을 바탕으로 귀족 행세를 했다. 이런 이유로 기존 귀족에 비해 오히려 '돈자랑'이 더 심했다고 한다. 기존 귀족을 대신해서 귀족이 됐다는 인식 때문에 부르주아는 더욱 돈자랑을 했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맑스가 이른바 공산주의를 설파하면서 ‘부르주아’와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로 나누는 계급 사회의 용어를 규정하면서 그때부터 유산계급을 ‘부르주아’로 아예 고정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