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정동년 별세,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2023-05-30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29일 오전 10시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 정 이사장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1990년대 전두환 법적 처벌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정 이사장은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당사자이면서 5월의 사형수라는 별명이 있다.

위기의 전두환 신군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전두환 신군부는 12.12사태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학생운동은 더욱 거세졌고, 재야에서는 비상계엄령 해제 요구가 높아졌다. 국회에서도 비상계엄령을 해제하는 본회의 개최를 시도했다. 이에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비상계엄령이 해제되면 전두환의 정치 개입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5.17쿠데타를 통해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계엄령이 확대되면서 학생 운동권 인사들과 재야 민주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자 5월 18일 광주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석방시키라는 시위가 확산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당황한 전두환 신군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크게 위축시키는 것은 물론 비상계엄령 확대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우기 위한 조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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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택 방명록 작성한 정동년

전두환 신군부는 내란음모 혐의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씌우기 위해서 핵심 연결고리를 북한과 정동년 이사장으로 봤다. 즉, 북한으로부터 자금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동년에게 자금을 전달했고, 그 자금이 광주로 흘러들어가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정동년이 광주 보안부대 지하실로 끌려갔는데 4월 13일 김대중 자택을 방문했다는 방명록이 발견됐다. 이에 광주 보안부대는 정동년에게 고문을 했고, 진술서를 쓰게 만들었다. 정 이사장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죄책감에 철제 숟가락으로 동맥을 절단하고 배를 찔러 자살하려고 했지만 발각됐다. 정동년 자술서를 다시 김상현 전 의원에게 들이 밀었고, 고문을 받은 김상전 전 의원도 진술서에 서명하게 했다. 북한과 연루됐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오로지 자백만을 증거로 해서 내란음모로 기소했다.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고, 전두환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을 집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김대중 구명운동이 일어났고, 국제사회의 압박에 전두환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미국으로 보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 갈 이유가 없다면서 완강히 버텼지만 결국 전두환은 김 전 대통령을 보낸 것이다.

5.18 특별법 제정

1995년 5.18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유죄 판결 받은 인사들에게 재심의 기회가 열리게 됐다. 정동년 이사장은 당시 사형선고를 받았고, 1982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1986년 5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인천시위에 참여했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세 번째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 등을 맡았고, 1988년 조선대 교지 편집장 이철규 의문사 규명 투쟁을 하다가 1989년 체포돼 네 번째 수감생활을 했다.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신군부 고문 수사를 폭로했고, 1994년 5월에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전두환씨 등 신군부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고소하며 법적 처벌을 이끌었다. 1999년 9월 국민회의(현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광주 남구청장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2년 5월에는 무소속으로 광주시장 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2005년 안산도시개발㈜ 사장, 2009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초빙교수, 5·18민중항쟁 30주년 기념행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해부터는 5·18기념재단 이사장과 5·18민중항쟁행사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