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칼럼] 삼성그룹의 도전과 위기(8) : 미·일 반도체 무역협정체결

2022-06-02     정인준
[파이낸셜리뷰] 한국반도체의 미국 측 파트너 지분 50%를 마저 인수해 1978년 3월2일 출범한 삼성반도체가 1982년 10월1일 한국전자통신의 반도체사업부를 인수하여 새 출발한 삼성반도체통신은 기술도입선인 일본 NTT의 전자교환기용 반도체 부품이나 디지털시계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1983년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개발 초기 단계에 총 매출이 200억원에 불과한 삼성전자가 VLSI 소규모 생산라인에 약 470억원을 투자하였는데 인력, 기술 및 채산성 등 모든 측면에서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미래가 막막한 상황이었다. 호암 이병철은 1983년 4월18일 기흥 10만평 부지에 반도체 D램을 대량 생산할 공장건설을 지시함과 동시에 1983년 7월11일 미국 현지에서 반도체 기술개발 및 판매를 할 현지법인 Tri Star Semi-conductor 설립을 지시하여 후일 반도체 신 제품개발에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된다. 삼성이 반도체 개발에 그룹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 동원하여 64K D램 반도체를 개발한 시기는 1983년 9월1일 소련 전투기가 사할린 섬 부근 해역에서 대한항공 007을 격추했고, 1983년 10월9일 북한이 버마를 국빈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아웅산 테러를 자행하여 장관, 청와대 수석이 다수 사망함에 따라 남·북간, 미·소간 긴장이 고조된 시기였다. 1983년 한국의 안보위기 속에 삼성의 반도체 사업에 기회가 온 것은 1985년 9월22일 일본 엔화의 대폭 절상을 결정한 ‘플라자 합의’(달러 환율은 1달러에 235엔에서 1년 후 120엔 대에 거래)와 1985년 7월31일 미·일 반도체 무역협정 체결로 D램 미국시장의 75%를 점유(1984년)하던 일본이 반도체 대미 수출 규모를 감축하게 되는 반도체 시장의 변화이다.

미·일 반도체 무역협정 체결

작은 반도체 칩 하나에 저항기, 축전기 및 트랜지스터를 올리고 간단하게 회로를 연결하는 반도체 기술은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Jack Kilby)와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의 특허신청(1959년)에서 출발하였다. 노이스는 1968년 고든 무어와 인텔을 창업, 1976년 16K D램을 개발하였다. 일본 정부는 1976년 반도체공업을 국책산업으로 지정, 초기 VLSI(초고밀도직접회로)연구 지원을 결정하고, 1977년 이후 4년 간 NEC, 도시바, 미쓰비시, 히타치 등 에 개발비 737억엔 중 446억엔을 지원했다. 일본의 民官 반도체 개발은 1977년 16K D램 개발로 이어지고, 가격경쟁력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한다. 1970년 대 후반 불경기를 맞은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설비투자를 줄이고 일본 전자업체에 D램 등 메모리 칩 제조를 맡기게 된다. 1978년 10월 후지쯔가 64K D램을 개발했고, 1980년 2월 NEC가 인텔과 거의 동시에 256K D램을 개발하자 인텔은 기술을 도둑맞았다며 억울함을 정부에 호소한다. 1980년대 초 NEC,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의 년 평균 반도체 매출액은 80억$인 반면 Texas Instrument와 모토롤라 매출은 각기 41억$, 31억$에 불과했고, 다른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년 매출은 10억$ 미만이었다. 일본이 대미 반도체 무역에서 천문학적인 흑자를 내고, 반도체 적자가 미국 무역·재정 쌍둥이 적자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급격히 악화하였다 일본의 대규모 설비투자와 양산을 통한 低價 전략으로 미국 반도체 시장을 공략해 가자 미국에서는 “제2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비난 여론이 일어나면서 미·일의 반도체 무역 분쟁이 일어난다. 1982년 미국 IBM, GE의 반도체 라인을 시찰한 호암과 이건희 부회장이 반도체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호암은 미·일 반도체 분쟁이 한창이던 1983년 2월8일 도쿄에서 삼성의 초고밀도직접회로(VLSI) 진출을 결정하였다는 도쿄선언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