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바르바리 해적, 미 해군 창설

2022-06-02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서구 유럽 사람들에게는 가장 악질적인 해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바르바리 해적’이다. 이들 해적에게 납치된 서구 유럽 사람들이 대략 150만~200만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구 유럽 사람들에게 ‘바르바리 해적’을 이야기하면 몸서리 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백인 노예 이야기 역시 바르바리 해적과도 연관돼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바르바리 해적은 15세부터 19세기 초까지 3백년 동안 북아프리카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일대에 존재했던 무슬림 해적 집단으로 전 유럽을 상대로 약탈을 벌였다. 유럽은 바르바리 해적에 대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들을 소탕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하지만 바르바리 해적을 소탕하는 것이 아무리 강력한 왕권 국가라고 해도 가능하지 못했다.

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도 바르바리 해적에?

바르바리 해적은 서기 7~8세기부터 존재해온 해적이다.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는 악명 높은 해적이었다. 846년에는 로마시 외곽을 공격해 구 성 베드로 성당을 약탈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후에도 바르바리 해적의 해적질은 유명했고, 1390년 프랑스와 제노아 연합 함대가 바르바리 해적의 주요 도시였던 마흐디아를 포위 공략했지만 실패했다. 다만 15세기 말에 ‘바르바리’라는 이름이 붙이게 된 것이다. 18세기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자 바르바리 해적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서구 범선 제조 기술까지 받아들이면서 단순히 지중해 약탈을 넘어 대서양 약탈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아일랜드, 영국, 아이스란드 해안가도 나타났고, 19세기 초에는 미국과 러시아도 그 피해가 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럽인을 납치해서 모로코, 알제리,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았다. 남자들은 온몸의 털을 모두 깎아 노역장 등에서 죽을 때까지 착취를 했고, 소용이 없으면 개죽음 당했다. 여자들은 하녀 등이나 성노리개가 됐다. 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도 항해 도중 납치돼서 알제리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5년만에 몸값 지불 후 풀려났는데 바르베르 해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다만 더 큰 장사는 역시 몸값 요구였다. 몸값이 제법 나가는 유럽인들을 붙잡아서 몸값 지불을 해서 돈을 벌었다. 이를 위해 유럽에서는 구출 기사단이나 구출 수도회가 창설됐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그것은 오스만 제국이 바르바리 해적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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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드린 바르바리 해적

19세기 초반만 해도 지중해 일대에서 해적질을 했던 바르바리 해적은 대서양으로 진출했다. 북아메리카 해안가 마을을 침략해 주민들을 납치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미국은 독립하기 전에는 미국 선박들도 영국 국적선이기 때문에 영국의 군함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독립운동이 주로 미국 본토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해군을 키우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독립이 되고 나니 바르바리 해적의 주요 타켓은 미국 상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상선은 군함이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인식이 바르바리 해적에게 강하게 깔리면서 주요 약탈 대상은 미국 상선이 됐다. 바르바리 해적은 계속해서 미국인들을 납치하고 미국에 몸값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윌리엄 베이브리지가 미국인 몸값의 협상가로 오스만 제국에 입항을 하려고 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입항을 거부하면서 성조기 대신 오스만 제국 깃발을 달고 입항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그러자 미국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해군 창설 및 군비 증강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함대는 미국 상선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독립전쟁 당시에는 영국군을 미국 본토에서 몰아내는 것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해군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바르바리 해적들이 약탈을 하면서 미국민들도 ‘해군’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고, 당시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역시 국회 연설을 통해 해군 필요성에 대해 설득했고, 결국 미 의회에서도 해군 창설에 동의를 해줬다. 그런 과정 속에서 1801년 5월 14일 바르바리 해적의 본거지인 트피폴리에서 파샤(오스만의 귀족 혹은 지방총독 등을 의미한다)가 미국 영사관의 성조기 깃대를 칼로 베어서 성조기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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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2차 바르바리 해전 발생

결국 1차~2차 바르바리 해전이 발생했다. 두 전투 결과 모두 미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바르바리 해적들은 더 이상 미국을 건드리지 않는 상황이 됐다. 아울러 유럽 사회에서도 단순히 땅덩어리만 넓은 약소 신생국 ‘미국’으로 알고 있었던 기존 인식을 버리고 미국이 강대국이라는 인식을 하게 됐다. 왜냐하면 몇백년 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바르바리 해적을 상대로 승리를 했기 때문이다. 다만 바르바리 해적을 완전히 소탕한 것은 아니었다. 미 해병대의 군가에는 몬테수마 궁전에서 트리폴리 해변까지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는 바르바리 해전을 묘사한 것이다. 바르바리 해전 이후 서구 유럽이 바르바리 해적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동안 바르바리 해전을 통해 대서양 교역에 우위를 점한 미국으로서는 빠르게 경제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바르바리 해적이 유럽 상선은 약탈해도 미국 상선을 약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르바리 해적은 결국 프랑스가 알제리나 모로코를 식민지화하면서 소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