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로마의 라티푼디움 그리고 봉건국가 탄생

2022-06-08     어기선 기자
국유지를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라티푼디움은 우리말로 장원(莊園)이다. 라티푼디움은 로마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됐고, 그것은 봉건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국가나 중세시대에는 라티푼디움 형태로 농업 생산을 향상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로마와 봉건국가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로마는 지력(地力) 즉 땅의 힘을 키우기 위해 2~3년 땅을 쉬게 했고, 그때 자영농민들이 군대로 나아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웃국가를 정복해서 거대한 왕국을 만들었다.
사진=픽사베이

카르타고에서 출발한 제도

원래 라티푼디움은 카르타고에서 운영하던 제도이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가 멸망하면서 라티푼디움이 로마로 흘러들어오게 됐다. 고대국가의 농사 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력 보존이 어려웠다. 따라서 경작을 하고 나면 2~3년 동안 농지는 쉬어야 했다. 이 시기에 자영농민은 일거리가 없었다. 초기 로마의 군대가 형성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땅의 휴지기를 휴한기라고 불렀는데 이때 자영농민은 군대에 들어갔고, 로마는 이를 바탕으로 정복 사업을 할 수 있었다. 휴한기에는 전쟁으로 물자와 식량을 확보한 자영농민은 농번기가 되기 전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문제는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장거리 원정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휴한기를 넘기게 되면 땅은 잡목과 잡초로 우거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노예를 통한 농장을 경영하는 라티푼디움이 도입되게 됐다. 문제는 노예를 확보한 장원주는 원거리 전쟁에 나가서도 자기 땅에서 농사가 충분히 됐고, 정복전쟁을 통해 더 많은 노예를 확보하면서 자기 땅을 넓혀나갈 수 있었지만 자영농민은 잦은 전쟁으로 농지를 관리하지 못하면서 더욱 가난해졌다는 점이다. 이에 몰락하면서 자영농은 땅을 헐값에 내놓았고, 장원주들은 헐값에 땅을 매입하면서 토지를 늘려나갔다. 이에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그라쿠스 형제가 개혁을 들고 나왔는데 국유지 가운데 일부를 몰락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티푼디움을 통해 귀족이 된 원로원 구성원들은 이에 대해 반대를 했다. 결국 그라쿠스 형제는 암살됐고, 카이사르가 집권하면서 농지법을 통과시켰지만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됐다.
사진=픽사베이

더 이상 노예 공급이 되지 않고

그런데 로마의 정복 사업도 한계에 다다르게 됐다. 그러면서 노예 공급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노비를 결혼시켜서 대대로 노비를 양산하는 방식으로 해결을 했지만 로마의 노예는 죽을 때까지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노예는 그 대(代)에서 끝나면서 노예 공급이 더 이상 쉽지 않게 됐다. 로마에 더 이상 노예가 공급되기 힘들다는 것은 로마 방식의 라티푼디움이 운영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로마 후기에 들어와서는 군인 출신 황제가 잇따라 집권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주화를 무차별 살포했다. 그러다보니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상공업이 몰락하게 된다. 이에 주화로 월급을 받았던 군인들은 더 이상 주화로 월급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지역주민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변방을 지키던 군인들이 점차 해당 지역의 토지에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되면서 라티푼디움은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군인 출신 황제들 중 일부는 원로원을 해산하게 되면서 원로원 의원들이 각자 지역으로 내려가서 라티푼디움을 운영하게 됐다. 그것은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됐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역주의화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로마는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그리고 봉건국가로 나아가게 됐다. 더 이상 노예를 공급받지 못한 로마는 라티푼디움이 노예에서 점차 자유농민으로 바뀌게 되고, 원로원 의원들이 군인 황제들에 의해 쫓겨나면서 각 지역의 영주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점차 게르만 민족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하면서 봉건시대의 라티푼디움으로 바뀌게 됐다. 노예에 의해 운영되던 라티푼디움이 노예 제도가 로마와 함께 사라지면서 농노라는 새로운 형태의 라티푼디움으로 바뀌게 됐고, 그러면서 봉건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