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김영삼 단식 농성 해제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3년 6월 9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식 농성을 해제한 날이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 기념일을 기점으로 민주화 5개항 요구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전두환 정권에서 사실상 야당이 와해된 상태가 되면서 야당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으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민주화 5개항 요구를 전두환 정권이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야당의 야성을 깨우고 학생들과 재야단체들에게 각성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87년 민주화운동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상 정계은퇴 다름 없는 가택연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서거 사건 이후 전두환 신군부는 12.12 쿠데타를 통해 군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5월 17일 5.17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후 당시 야당 정치인을 비롯해 학생들과 재야세력 모두를 구금했다.
그러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시킨 후 미국으로 보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이라는 조치를 단행했다. 물론 일시적으로 가택연금을 해제한 적도 있었고, 이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산악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당은 김대중·김영삼 두 거목을 잃어버리면서 와해됐고, 전두환 정권에서 야당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198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미국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했고, 5월 18일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5개항은 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들의 복직, 정치활동 규제의 해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 등이다.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가자 함석헌, 문익환 목사 등 재야 인사들이 찾아와 위로 했고, 재야 인사들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언론에 알리려고 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자 측근들은 이를 언론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5월 19일 상도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주산악회’ 70여명이 ‘김영삼 단식 대책위’를 구성하고 동조 단식에 들어갔다.
김영삼 전 대통령 배우자 손명순 여사는 일일이 전화로 외신기자들에게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투쟁을 알렸다. 그러자 외신들은 일제히 단식투쟁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언론 검열을 했기 때문에 국내 언론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에 대해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결국 재야인사들과 상도동계 인사들이 대학가나 골목을 돌면서 ‘김영삼 총재 단식 돌입’이라는 유인물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 소식을 듣자마자 미국에 있는 언론들에게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을 알리는 인터뷰 등을 했다. 또한 뉴욕타임즈에 김영삼의 단식 투쟁에 대한 보고서인 ‘Kims, Hunger Strike’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5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 자택에 사복경찰과 정보요원을 투입해서 강제로 서울대 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체의 치료 행위를 거부했다.
연금 해제
5월 27일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았다. 권익현 사무총장은 ”대통령 각하께서는 총재님이 단식을 끝내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면서 단식투쟁을 풀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건강이 회복되신다면 그 다음 일본이나 유럽, 아니면 미국이라도 원하시는 어디든 가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가족과 동반하여 가셔도 좋고 외국에서의 주택 제공은 물론 생활비도 일제 지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면서 연금 해제를 약속했다.
그러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씰데 없는 소리, 우리국민이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외국에 나갈 수가 있겠소? 나에 대한 연금 해제가 문제가 아니오. 내가 요구한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이 정권도 이승만, 박정희를 따라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란 말이요.권 총장은 이 말을 대통령에게 꼭 전해주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투쟁 중단 작업을 포기하게 됐다.
6월 1일 전현직 국회의원을 포함한 58명이 연대 투쟁을 선언했다. 또한 신민당계 인사들이 단식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인쇄기로 복사해 대량 살포했다.
단식 22일째인 6월 9일 재야 원로 인사들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결국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그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설득도 작용했다고 한다.
야당성 되찾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투쟁이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5개항을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투쟁이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잠자고 있던 야당성을 깨운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야당성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단식투쟁을 계기로 야당성을 되찾기 시작했고, 그것은 1985년 총선 때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게 됐고, 1987년 민주화운동과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원동력이 됐다.
훗날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특검법 통과를 위해 열흘간 단식투쟁을 했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굶으면 학실히(확실히) 죽는다”면서 만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