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로마 군대의 변천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로마 군대는 초창기에는 민병대였다. 부족국가에서 출발한 로마이기 때문에 왕정국가인 로마에서도 민병대 규모였지만 점차 영토를 확장하면서 그에 따른 로마 군대에도 변화가 생겼고, 그 변화는 왕정 국가가 무너지고 공화정을 여는 계기가 됐다.
공화정이 되면서 영토는 점차 넓어지면서 그에 따라 또 다시 변화가 불가피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용병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 용병 제도 도입은 곧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황제 즉 제정국가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그 용병 제도 역시 영토가 너무 넓어지면서 독이 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통해 오늘날 서유럽 국가들이 나타나는 밑바탕이 됐다.
민병대에서 출발한 로마 군대
로마 군대는 초창기 부족국가에서부터 민병대로 출발을 했다. 민병대라고 하면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 시기가 도래하면 뭉쳐서 군대가 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부대는 5개의 부대로 이뤄졌는데 각자 재산 보유에 따라 장착할 수 있는 무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민병대이기 때문에 ‘자원병’이다. 즉 스스로 지원해서 군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무기도 스스로 장착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대장간에서 무기를 구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상공업도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민병대가 돼서 이웃국가를 정복하게 되면 5개 부대별로 약탈한 재산과 노예가 나뉘어지게 됐다. 그것은 또 다시 민병대가 전쟁에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영토가 넓어지면서 징집제로
하지만 영토가 넓어지면서 원정을 가야 할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민병대였기 때문에 1~2년 원정을 가게 된다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점차 자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왕정국가인 로마에서는 그것이 곧 고민거리가 됐고, 이런 이유로 세르비우스 왕은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은 징집된 병사를 바탕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원병 형식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무기를 장착해야 했다. 즉, 왕에게 얻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왕에 대한 충성도는 낮았고, 오로지 ‘로마’를 위해서 싸우는 군대였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시민의식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왕을 압도하는 것이 됐다.
이에 로마 광장에서 징집된 민병대 군사들이 토론을 하기 시작했고, 국정 운영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발언권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왕정국가 로마는 무너지게 됐고, 공화정 로마가 탄생하게 됐다.
공화정 로마, 용병의 출현
공화정의 로마 역시 계속해서 정복전쟁을 일으켰다. 정복전쟁을 해야만 재산을 약탈할 수 있고, 노예를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토가 넓어지면서 방어를 해야 할 지역도 넓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용병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징집에는 ‘프롤레타리’라고 불리는 무산자 즉 재산이 없는 도시 거주민들은 제외가 됐었다. 하지만 군대가 더 커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공화정 로마는 무산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에게도 징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문제는 이들이 ‘돈’ 즉 재산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전쟁을 치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에게 급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에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했는데 로마 군단은 병사에게 급료를 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대로 ‘프롤레타리’에게도 징집 대상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무기는 국가에서 충당하고 제대 후 토지를 나눠줬다.
그렇게 되면서 군대는 ‘자원’ 혹은 ‘징집’이 아닌 ‘용병’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것은 과거 부족국가 혹은 왕정국가 혹은 공화정에서의 군대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치고, 영토를 정복한 후 정복된 영토에서 재산을 약탈하고 노예를 만드는 식이 아니라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군역을 지는 직업군인이 나타났다.
이런 직업군인은 상사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시스템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로마 통치자로 집권하는데 영향을 줬다.
로마 내전 당시 카이사르는 4개의 군단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의 서유럽 지방을 정복하면서 충성스런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군대로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로마를 장악했고, 공화정 로마가 제정 즉 황제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민병대에서 상비군으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최초 황제가 되면서 로마 군단을 기존 민병대에서 상비군으로 개편했다.
이는 영토가 계속 확대되면서 속주를 관리할 병사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속주 시민들로 이뤄진 예비병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영토는 넓어지면서 관리해야 할 영토가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병사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국경선을 영구히 요새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로마군이 성벽과 진지를 쌓으면서 수비에만 의존하는 군대로 바뀌었다.
그러자 로마시민 군인들은 점차 지방민이 돼버렸다. 해당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에 따라 병력이 부족해졌다. 특히 잇따른 화폐 개혁으로 인해 로마 군인들이 급료로 받는 주화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군인들은 더 이상 군대에 매달려 있으려고 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다보니 병력이 부족해지게 되고, 그것을 채워넣어야 수비가 되기 때문에 점차 게르만 용병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초반에 게르만 용병은 로마에 충성하면서 로마를 지키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로마 주화가 더 이상 쓸모없는 가치의 물건이라는 것을 게르만 용병들도 깨닫기 시작하면서 지역 곳곳에서 왕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서유럽 국가들이 이런 식으로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