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농노제

2022-06-10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농노제는 봉건제 유럽 중세 사회에 존재했던 하층민 중 하나이다. 농노는 땅에 예속돼 농민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해당 영지 지배자인 영주에 종속됐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시대의 노예와는 다른 개념이다. 농노는 라티푼디움에 종속된 사람들이지만 로마 시대의 노예와는 또 다른 신분이다. 스스로 자유민이라고 생각했고, 영주 역시 그들은 노예로 보지 않았다. 다만 농지에 예속된 인간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로마시대는 노예가 주요 노동력이었다면 중세시대 봉건제에서의 주요 노동력은 농노였다. 그런 점에서 봉건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농노’라고 할 수 있다.

농노는 로마시대부터

로마 후기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정복활동을 하지 않게 되면서 노예의 유입이 급감했다. 노예의 신분은 자식으로 계승하지 않았던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1세대가 끝나고 나면 새로운 노예를 유입해야 한다. 그러자면 영토를 확장하거나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사와야 했다. 그것이 로마 후기로 갈수록 쉽지 않은 상태가 되면서 점차 노예라는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노예는 봉건시대에도 엄연히 존재한 계급이었지만 크게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로마 후기가 들어오면서 변방 지역 즉 서유럽 중심으로 군대가 용병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로마시민으로만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면서 용병으로 채워졌는데 그들에게 급료를 지급해왔다. 하지만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주화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자 이들 용병은 더 이상 황제의 급료로 생활을 하기 어렵게 되면서 점차 지역 토착주민으로 바뀌게 됐고, 그들이 농사를 짓고 살기 시작했다. 게다가 541년경부터 발생한 1차 흑사병이 200년 동안 전유럽을 강타하면서 대략 5천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시 말하면 농사를 지어야 할 사람들이 부족해진 것이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도 농노제가 정착하는데 하나의 요인이 됐다. 게르만족의 특징은 주종관계가 ‘계약’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이다. 동양적 관점으로 주종관계는 수직적 관계이지만 게르만족의 주종관계는 그야말로 계약관계이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회사에 편입된 직장인과 같은 개념이었다. 근로계약서에 의해 주종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구 유럽이 게르만족에 의해 차지하면서 이같은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됐다. 농노는 토지에 얽매인 사람이지만 영주에게 얽매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언제든지 영주를 바꿀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사원에 얽매인 농노도 있었고, 영주 A에 얽매인 영주도 있었고, 왕에 얽매인 영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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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티푼디움 경영은 주로 농노가

철제 무기가 발달하면서 점차 기병의 역할이 더 커져갔고, 전투 방식이 기존 중보병 위주에서 기병 위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기사(騎射)가 탄생했다. 말 위에서 철갑옷을 입고 긴창을 들고 찌르는 형식의 전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잦은 이민족의 침입이 생기면서 영주와 농노의 관계가 계약관계에 의해 맺어지기 시작했다. 농노는 영주의 땅을 대신 경작을 해주고, 영주는 그런 농노를 보호해주는 그런 식으로 관계가 바뀌게 된 것이다. 잦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영주가 전투에 나가는 것이 잦아지면서 농노는 영주의 땅을 대신 경작하고, 영주는 그런 농노를 보호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이유로 중세 초창기에는 영주가 농노를 통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중세 중기로 갈수록 영주가 농노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재판권을 갖고 통제를 하고, 부역을 부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점차 영주의 영향력은 커지고

영주와 농노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영주와 국왕과의 관계 역시 주종관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봉건국가가 탄생하게 됐다. 봉건국가라고 하면 동양적인 개념과 서양적인 개념은 전혀 다르다. 동양적인 개념은 군신관계를 의미하지만 서양적 개념은 계약에 의한 주종관계를 의미한다. 국왕은 자신의 나라에 있는 영토를 신하(봉신)에게 나눠주고, 신하는 그 땅을 받은 대가로 국왕에게 충성을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국왕이 자신의 나라에 있는 영토를 신하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신하(봉신)이 자신이 영토를 정복하고 나면 그것을 왕이 인정해주는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신하는 왕에게 세금을 납부할 이유가 없다. 왕 또한 신하들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가 없었다. 왕 또한 자신의 영토가 있었고, 그 영토는 농노가 경작을 했다. 왕과 신하의 관계는 그냥 수평적인 주종 관계일 뿐이지 왕이 신하를 컨트롤 할 수 없었고, 신하는 왕에게 굳이 복종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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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거치면서

농노 제도가 봉건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사라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그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왕으로서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왕의 입장에서는 귀족들이란 언제든지 프랑스 혹은 영국에 붙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왕이 귀족들과 국정운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력이 필요하면서 도시거주민 즉 브루주아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경우에는 유명무실했던 삼부회가 열리고, 브루주아는 그동안 영주에게 세금을 냈던 것을 왕에게 세금을 내면서 자치권을 얻거나 귀족으로 편입되게 이르렀다. 아울러 2차 흑사병이 중세시대 휩쓸면서 농노의 인구는 대폭 감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농노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게 됐다. 이와 더불어 십자군 전쟁 이후 상공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영주의 권위 보다는 오히려 도시의 입지가 더욱 커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농노의 개념이 사라지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농노는 토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도망을 하기도 하고, 도시로 나아가 도시 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영주 입장에서는 자신의 토지를 경작해줄 인력이 부족하기에 이르렀다.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서 사람을 구하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게 해야 했다. 이에 영주는 농노에게 토지를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작 개념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농노는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동시에 영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개념이었다면 소작농은 영주의 토지에 묶여서 그 토지를 경작하고 그에 따른 수확물을 일정부분 떼서 영주에게 바치는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농노제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농노제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00년대 초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