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Hi스토리] 대우그룹

2022-06-14     전완수 기자
김우중
[파이낸셜리뷰=전완수 기자] 대우그룹은 1967년부터 2000년까지 우리나라 경제를 호령하던 4대 재벌 중 하나이다. 지금은 해체된 기업 집단이다. 대우그룹은 우리나라 고도성장의 상징이면서도 고도성장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그룹이라는 평가도 있다. 창업 초기는 흔한 중소기업이었지만 김우중 회장의 경영 능력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4대 그룹까지 성장한 기업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 김우중 회장이기도 하다.

샐러리맨의 신화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김우중 회장도 샐러리맨의 신화였다. 1967년 한성실업 출신 샐러리맨 김우중은 ‘대우실업’을 설립하고 와이셔츠 등 공산품을 수출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경제 성장 및 수출 호조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그것을 바탕으로 1973년 영진토건과 동양증권을 인수했고, 1974년 동남전자를 인수해 ‘대우전자’로 개편했다. 1976년 부실기업인 한국기계를 인수해서 중공업 사업에 손을 뻗었고, 1979년 대한조선공사로부터 옥포조선소를 인수해 ‘대우조선’을 세웠다. 그해 새한자동차도 인수하면서 중공업사업군을 형성했다. 그러면서 점차 몸집이 커졌고, 이에 1981년 대우개발과 대우실업이 합병해 (주)대우로 출범했다. 1983년에는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대한통신공업, 광진전자공업 등을 인수하면서 전기/전자 사업에 손을 뻗었다. 1984년 경남기업도 인수했다. 이같은 M&A 작업과 동시에 해외 자원개발, 해외 건설, 조선 수주 등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러면서 1980년대 후반에는 ‘세계경영’을 타이틀로 내걸었다. 이런 이유로 김우중 회장의 별명이 ‘킴지스 칸’이었다. 대우그룹의 로고 역시 5대양 6대주를 형상화한 것이다. 대우그룹의 경영은 매우 공격적이면서 확장적이었다. 물론 당시 모든 기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던 때였지만 대우그룹은 그야말로 동구권 국가들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당시 기업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미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경영 활동을 했지만 대우그룹은 동구권 국가들의 시장까지 노리면서 확장을 하면서 그야말로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 대우그룹을 만들려고 했다.
사진=연합뉴스

너무 공격적인 경영이 오히려 독

그런데 이런 과도한 공격적인 투자가 오히려 독이 됐다. 당시 구 공상권 국가들은 경제 성장이 절실했기 때문에 대우그룹의 투자는 반가웠고, 대우그룹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금융 지원을 받아 동구권 국가에 투자를 했다. 또한 “만들어라. 그러면 팔릴 것이다”라는 것을 앞세워 무조건 만들어 내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수요와 공급의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부채가 돼버렸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IMF 등으로 인해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대마불사’ 즉 큰 말은 죽지 않는다면서 공격적인 경영을 해나갔다. 그러나 1999년 대우자동차를 살리기 위해 삼성자동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을 시도했지만 SM5 생산 문제와 부산 하청업체 문제 등이 나오면서 끝내 실패가 됐고, 엄청난 빚을 지게 되면서 8월 워크아웃과 10월 김우중 회장은 중국으로 도피하고 12월 임원단 전원 사퇴를 했다. 결국 (주)대우는 2001년 5월 상장폐지를 했고, 2006년 대우 계열 구조조정협약이 만료되고, 같은 해 5월 25일 법원에 파산신청을 내고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김우중 회장은 서울고법으로부터 징역 8년 6개월에 추징금 17조 원을 선고 받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