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6월 15일 마그나 카르타 체결

2023-06-15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215년 6월 15일은 잉글랜드 왕국 존왕과 귀족들 간에 마그나 카르타가 체결됐다. 국왕과 귀족 연합체 간의 단순한 서약서에 불과하지만 세계 정치사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계약서이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대전제는 의회주의를 나타내는 말이 됐고, 그것은 오늘날 의회제도를 탄생시키는 발판이 됐다. 민주주의의 표상이기도 한 마그나 카르타는 한동안 잊혀진 사문서 같은 것이었다. 절대왕조 시대에서는 마그나 카르타를 입에 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점차 시민의 권력이 높아지면서 잊혀졌던 마그나 카르타가 다시 부상되면서 현대에서는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다.

영국 최악의 왕 ‘존’

마그나 카르타를 체결한 왕은 ‘존’이다. 그의 형이 그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이다. 존왕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왕으로 평가되면서 후대에는 ‘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왕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소설 로빈훗에 나오는 악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존왕은 부왕인 헨리2세의 다섯 아들 중 막내아들이었다.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나서자 존은 실질적인 왕조의 지배자임을 내세워 왕이 되려고 했다. 그러자 리처드 1세가 반역을 진압하려고 영국으로 향한다. 그때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존왕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대의 몸을 돌보시라. 악마가 풀려났다”라고 보냈다. 존왕의 반역을 진압했지만 리처드 1세는 존왕을 용서했다. 그리고 리처드 1세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 분쟁이 발생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존이 왕이 됐다.

아서 등 반대파 숙청

당시는 봉건시대였다. 봉건시대라고 하면 국왕이 봉토(영지)를 봉신(신하)에게 하사하고, 봉신(신하)는 그 대가로 국왕에 충성하는 형식이었다. 문제는 이들은 계약관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의 관계 정도이다. A라는 대기업의 B라는 협력업체가 있다고 한다면 어느날 갑자기 A라는 대기업이 갑질을 한다고 하면 B라는 협력업체는 A라는 대기업을 버리고, C대기업 혹은 D대기업과 협력업체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봉건시대 봉신(신하)도 마찬가지다. 영국땅에 있는 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영국 국왕과 군신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국왕과도 군신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여기서 군신관계는 동양과 같은 군신관계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기가 모시는 왕을 갈아치울 수 있었다. 당연히 영국땅에 있는 귀족들 중에는 프랑스 필리프 2세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던 귀족들도 있었다. 존왕 당시 영국땅에 있는 귀족들 중 프랑스 필리프 2세와 군신관계를 맺었던 귀족은 뤼지냥가이다. 당시 존왕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를 하고 필리프 2세에게 존왕을 제소하고,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법정에 존왕을 세웠다. 그리고 필리프 2세는 영국땅에 있는 프랑스 소속 영지 즉 프랑스령을 아서라는 귀족에게 준다. 이에 격분한 존왕은 아서를 공격하고 생포를 했다. 그런데 당시 존왕의 강력한 동맹이었던 앙주 영주를 무시하고 행동을 했다. 아서 귀족을 생포한 존왕은 지하감옥에 가둬두고 굶겨 죽이는데 22명 정도였다. 이때 리처드 1세 부하들도 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서 귀족이 어떤 식으로 사망했는지 명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나 존왕이 죽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는 프랑스 땅에 있는 영국 영지 소속 귀족들에게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언제든지 존왕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앞서 언급한대로 봉건시대의 군신 관계는 계약 관계이기 때문에 존왕으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필리프 2세는 그 점을 빠르게 파고 들어가면서 프랑스 땅에 있던 영국 소속 영지를 빠르게 접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존왕은 수차례에 걸쳐 프랑스로 넘어간 영국 소속 영지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였지만 번번히 실패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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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귀족들과 런던 시민들의 반란

이처럼 수차례에 걸쳐 전쟁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를 했기 때문에 영국땅에 있던 존왕 소속 영지 귀족들도 존왕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존왕이 전쟁을 할 때마다 전쟁물자를 대어주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더 이상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급기야 1215년 무장봉기한 귀족들이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출정했다. 여기에 런던 시민들마저도 성문을 열어주면서 귀족들은 무혈 입성을 했다. 귀족, 성직자, 도시민까지 등을 돌리면서 존왕은 반란을 진압할 병력이 없었고, 퇴위는 물론 처형 위기까지 내몰리게 됐다. 그때 온건파 귀족들은 처형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고, 결국 마그타 카르타가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의회가 탄생했다.

존왕 이후 마그나 카르타는

마그나 카르타 체결 이후 존왕은 교황 인노첸시노 3세에게 귀족들을 고발했고, 인노첸시오 3세는 마그나 카르타를 무효 선언했다. 그 뒤를 이은 헨리 3세는 역시 아버지 존왕과 체결한 것이라면서 마그나 카르타를 무시했다. 그리고 절대왕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마그나 카르타는 사문서가 됐다. 17세기 들어서면 국왕과 의회가 대립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마그나 카르타가 다시 주목 받게 됐다. 전제왕권과 대결하면서 마그나 카르타가 의회주의의 대전제가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