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6월 16일 옥포해전 승리
2023-06-16 어기선 기자
임진왜란 발발, 패색 짙은 조선군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선봉대 1만 8천700명이 부산포 해안을 상륙하면서 그야말로 조선은 풍전등화 같았다. 여기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100여척의 전선을 싸우지도 않고 침몰시켰다. 그 이유는 조선 수군은 상비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왜군이 전선을 가지게 된다면 조선 수군으로서는 엄청난 피해가 예상됐다. 따라서 원균은 100여척의 배를 침몰시켰다. 만약 이때 왜군에게 100여척의 배를 빼앗겼다면 화포를 달아서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싸웠을 것이고, 해전 양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역사학자 중 일부는 원균이 가장 잘한 일은 100여척의 배를 침몰시켰다는 것이다.옥포의 중요성
원균은 그 이후 전라좌수영 즉 이순신 장군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전라좌수영 병력을 총동원해서 당포 앞바다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고민을 했다. 왜냐하면 전라우수영 이억기 장군의 병력이 모이지 않았고, 전라좌수영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4척의 판옥선으로 과연 바다로 나아가 승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녹도 만호 정운이 이순신 장군을 설득했고, 결국 전라좌수영 병력만으로 첫 출정을 할 결심을 한다. 당포에 도착했을 때 원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이순신 장군은 원균에게 빨리 나타나라고 하자 1척의 판옥선으로 합류를 했고, 경상우수영 장수들이 3척의 판옥선과 2척의 협선을 이끌고 본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로 진격,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 50척을 발견한다. 그리고 함포 사격을 해서 26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다. 옥포의 지리적 중요성이 상당했다는 점에서 이날 해전의 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산진에서 왜군의 적선들이 출항을 하게 되면 옥포를 거쳐 한산도(통영)으로 나아가면 곧바로 전라도로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옥포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다이묘 입지 변화 불가피
이날 옥포해전의 승리는 임진왜란 첫 승리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 왜군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재산적 손실을 가져온 전투였다는 점에서 향후 임진왜란의 성격이 다르게 됐다는 것을 말한다. 왜군 입장에서는 군함 격침은 병력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병력 손실은 다이묘 입장에서는 영지 내 백성들을 징발해서 채우면 되는 문제였지만 군함 손실은 다이묘의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는 문제였다. 군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이묘의 막대한 재산이 들어가야 한다. 도도 다카토라 함대가 박살났다는 것은 도도 다카토라 입장에서는 임진왜란에서 더 이상 수군으로 활동할 수 없고, 육군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도도 다카토라는 막대한 재산적 손실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왜군 속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수차례 해전에서 다이묘 함대가 박살나면서 그들의 정치적 입지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이묘 입장에서는 전재산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임진왜란 참전한 것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조선땅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자신의 영지 내에서 반란이라도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산도 대첩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더 이상 해전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단순히 이순신 장군에게 계속 박살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해전을 계속 할 경우 다이묘들은 전재산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로 인해 파산하면서 일본 다이묘 영지 내 정치세력의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육군의 전투 방식 바뀌게 돼
옥포해전은 우리 조선군 특히 육군에게 전투 방식을 바꾸게 한 해전이기도 하다. 신립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기병을 앞세워 전투를 했지만 패배를 했다. 조총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해도 승리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했다는 소식은 육군의 전투 방식에 지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칼이나 활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포’를 사용하는 전투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해 11월 9일(음력 10월 6일) 벌어진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천800명의 조선육군은 3만명의 왜군을 맞이해서 싸워 승리를 했는데 이때 대포가 주효했다. 또한 행주대첩 등에서도 대포를 이용해서 승리를 거뒀다. 옥포해전 이후 육군이 승리하는 전투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대포’였다. 즉 대포를 이용해 엄청난 숫자의 왜군을 막아내고 승리를 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조선 육군은 단순히 칼과 활로 하는 전투였지만 이때부터 대포를 이용한 근대전으로 전환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