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암행어사, 그리고 탐관오리

2023-06-16     어기선 기자
kbs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암행어사는 민심 시찰을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해 여러 지방을 순행하면서 탐관오리를 잡아내는 임무를 맡은 관직이다. 암행어사는 지방권력을 중앙정부가 감시하는 기능이기 때문에 왕권 강화와 연결된다. 다시 말하면 왕권이 강화된 시점에서 암행어사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만 왕권이 약화되는 시점에서 암행어사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방권력자에게 끌려다니는 신세가 된다. 영·정조 시기에 암행어사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지만 세도정치 시절에 암행어사 기록이 드물어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암행어사보다 ‘어사’ 선호한 조선시대

사실 조선시대는 암행어사보다는 ‘어사’를 선호했다. 어사는 특별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하던 사신을 말한다. 이는 공식적으로 왕이 파견을 보내는 사신이기 때문에 해당 고을 수령도 어사 파견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암행어사는 고을 수령 모르게 파견하는 사신이라는 점에서 왕의 입장에서나 고을 수령 입장에서 암행어사보다는 차라리 ‘어사’를 파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예컨대 경상도 지방에 가뭄이 들거나 전라도 지방에 홍수가 난다면 암행어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사’를 보내서 지방 백성들을 위무하는 것이 왕의 입장에서는 더 나은 선택이었다. 다만 고을 수령이 탐관오리라는 소문이 돌거나 백성들의 고통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그에 따라 암행어사를 파견했다. 따라서 시시때때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만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이다. 암행어사는 주로 당하관 젊은 신하를 발탁한다. 지방에 파견을 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이 상당하기 때문에 나이 많은 신하를 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암행어사는 ‘관찰사’와 동급이었다.
kbs

육체적 고통 심했던 암행어사

암행어사는 육체적 고통이 심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대 국가이다. 호남을 제외한 전지역이 산악으로 돼있다. 지방으로 파견된다면 대단한 체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당시 호랑이도 출몰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 아니면 암행어사를 하기 힘들었다. 일각에서는 암행어사 생존률이 30%도 안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봐도 암행어사로 사망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즉, 암행어사를 수행하다가 사망하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또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암행어사에는 ‘방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 한 사람만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행어사 한명과 방자라는 직업의 사람 한 명 이렇게 둘이 다닌 사례는 없다. 암행어사가 왕에게 바칠 보고서를 작성하면 그 보고서를 왕에게 전달해줄 사람 한 사람이 추가된다. 참고적으로 방자는 직업을 뜻한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공무원’이다. 여기에 지역 민심을 암행어사 혼자 살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 민심을 살필 사람 여러 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암행어사는 혼자 다닌 것이 아니라 최소 10명 이상이 같이 다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에 최소 10명 이상 다녔다.

어사 출두에 대한 오해

암행어사하면 ‘어사 출두’가 생각나지만 어사 출두는 아주 이례적이다. 왜냐하면 어사 출두를 하기 위해서는 역참에 있는 역졸들을 동원해야 한다. 역참에 가서 마패를 보여주면 마패에 새겨진 말의 마리수에 따라 역졸들을 동원했다. 그렇게 되면 일단 해당 지역에 암행어사가 출몰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간다. 즉 다른 고을 수령들이 대비를 하는 시간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문이 퍼진다는 것은 암행어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사 출두는 그야말로 부득이한 사정 아니면 하지 않았다. 탐관오리가 발견되면 해당 고을 관아에 가서 조용히 마패를 보여주고 봉고를 한다. 봉고는 관인을 빼앗고, 관할 감영으로 넘기는 일까지만 했다. 파직을 시킬 것인지 아니면 더 큰 형벌을 내릴 것인지는 ‘왕’이 결정했다.
kbs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의 충돌, 탐관오리의 출몰

암행어사 하면 어사 박문수를 떠올린다. 하지만 암행어사 박문수는 소문이 만든 허상일 뿐 실체는 없다. 왜냐하면 박문수는 암행어사를 떠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1727년 영남어사로 부정관리들을 적발하고, 1730년 호서어사로 기민 구제에 힘쓴 것이 전부이다. 즉, 공식적으로 어사 직책을 갖고 지방에 파견 나갔을 뿐 암행어사로 수행한 사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행어사 박문수로 부각이 된 이유는 영·정조 시대를 지나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태에서 암행어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암행어사는 암행어사 업무를 수행한 이후의 행적이 비참했다.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는 암행어사 시절 파면한 관리들에게 미움을 사서 귀양살이를 했다. 암행어사가 어사직을 내려놓고 난 후 정치적 보복을 당한 이유는 해당 고을 수령이 암행어사보다 관직이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암행어사 업무를 수행하는 기간에만 왕의 특별 관리이기 때문에 관찰사만큼의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었고, 암행어사 이후에는 다시 낮은 하급관리가 됐기 때문에 해당 고을 수령의 정치적 보복을 피할 수 없었다. 더욱이 세도정치 시절 암행어사는 사실상 지방관리에 비해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왕권이 약화됐고, 지방관리 임명은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정조가 사망한 후 왕이 된 순조나 헌종이나 모두 어린 나이에 왕이 됐고, 철종은 강화도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왕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종 역시 어린 나이에 등극했기 때문에 왕보다는 대원군이나 민씨 일가의 입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지방관리들은 권세가에 뇌물을 바쳐서 고을 수령 관직을 얻었다. 즉 뒷배가 든든하기 때문에 암행어사가 출몰한다고 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그것은 지방관료들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암행어사의 역할이 상당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고종은 암행어사가 고을 수령으로부터 접대를 받은 것에 대해 한탄하기도 했다. 그만큼 암행어사의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영조 시절 암행어사가 아닌 ‘어사’로 활약했던 박문수에 대한 그리움이 백성들 사이에 생겨났고, 그것이 설화가 돼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암행어사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고부군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가 탄생하게 됐고, 결국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