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6월 22일 남해대교 준공
2023-06-22 어기선 기자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섬 ‘남해’
남해‘섬’은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섬이다. 1383년 고려 우왕 9년 해도도원수 정지 장군이 남해현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관음포대첩이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인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남해현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의 함대와 싸운 노량해전이 있었다. 그런 유서 깊은 섬이지만 말 그래도 섬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접근이 불편했다. 남해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배를 타고 남해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다보니 남해 주민들은 소외됐다고 표현할 정도로 불편함을 느꼈다. 남해대교가 착공되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해대교가 처음 국비 사업으로 반영될 때 남해 지역구 국회의원은 이승만 정부 초대공보실장을 지낸 5선 경력 최치환 의원이었다. 당시 남해대교 계획에 대해 많은 의원들이 반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밀어붙였고, 결국 1968년 착공했다. 남해대교 예산은 한일협정 과정에서 식민지 피해보상으로 받은 청구권 자금이 대거 투입됐다. 철제 주탑과 케이블 등 주요 자재 역시 현물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이었고 전범기업의 자재가 투입됐다. 그런데 1971년 최치환 의원이 공천에서 떨어지면서 신동관 의원이 당선됐다. 그리고 1973년 완공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테이프를 끊은 사람이 신동관 의원이었다. 이런 이유로 ‘최치환 눈물다리, 박 대통령 허락다리, 신동관 자랑다리’라는 별칭도 얻었다. 참고로 최치환 의원은 김무성 전 의원의 장인이다.최초이자 최고령 현수교 완공
1973년 6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령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완성됐다. 길이 660m, 높이 52m, 너비 12m 등으로 준공 당시 놀라운 규모의 다리였다. 특히 수심 40m에 이르는 바다 속에 주탑 기둥을 세워 건설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놀라운 기술력을 선보인 다리이기도 하다. 당시 ‘세계에서 20번째로 긴 다리’라는 타이틀과 함께 아시아 최장의 다리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현수교는 이순신 대교로 주탑 간 거리 1천545m에 총 길이 2천260m, 주탑 높이 270m이다. 그 뒤를 울산대교(주탑 간 거리 1천150m), 노량대교(890m), 팔영대교(850m), 천사대교2(650m)가 잇고 있다.남해의 관광자원화
남해대교의 개통은 남해‘섬’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남해대교가 개통되고, 교과서에 남해대교가 실리게 되면서 ‘꼭 방문하고 싶은 섬’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 이유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부가 남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남해를 방문한 관광객들이라면 주변 경치에 한번 놀라게 된다. 다만 남해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접근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관광객들의 유입이 어려워졌다. 남해대교가 개통되고 관광객의 유입이 이뤄지게 되면서 주민들에게는 ‘부(富)’를 가져다주는 다리라는 별칭도 얻었다. 실제로 남해대교가 완공되면서 여러 가지 관광자원들이 개발됐는데 남해 다랭이 마을이나 남해독일마을이 있다. 그리고 미국마을도 있으며, 김만중이 유배를 왔던 연고가 있기 때문에 남해군 유배문학관이 있다.탈바꿈하려는 남해대교
그런 남해대교가 이제 탈바꿈을 하려고 한다. 창선·삼천포 대교와 노량대교가 개통이 되면서 고량으로서 기능이 다해가기 때문이다. 이에 남해군은 190억원의 예산으로 남해대교 관광자원사업을 벌인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 현수교라는 역사적 가치를 계승하는 등시에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활용해서 관광자원화한다는 것이다. 특히 남해 바래길과 연결하면 도보관광 명소로 유명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관광자원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